李裕稷
裕稷1896. 3. 27 ~ 1969. 3.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6년 3월 27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소식이 경기도 안성에 전파되자,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등이 마을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이를 마을 주민에게 알렸다. 이때 만세운동의 취지에 찬동하여 함께하였다. 원곡면·양성면 연합만세시위는 그 바탕에 두 지역 간의 지역적 동질감이 작용하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개편에 의해 안성군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과거 양성군(陽城郡)에 속했던 두 지역은 이후에도 동일 지역이라는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연합만세시위는 칠곡리의 이유석과 홍창섭,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과 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 현 평택시 죽백동)의 이양섭(李陽燮) 등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4월 1일 오후, 이유석·홍창섭 등으로부터 원곡면사무소 앞에서의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만세시위 참여를 결의하였다. 같은 마을 주민들인 이한영(李漢榮)·이병오(李丙五)·이상근(李相根) 등 만세시위 참여를 결의한 200여 명의 마을의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만세시위가 시작될 즈음 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주민들은 무려 1,000여 명의 규모였다.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주변의 주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의 열기가 고조되자, 이유석 등 주도자들은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을 면사무소 밖으로 끌어내 이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이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모습에, 시위의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이에 이유석·홍창섭 등 주도자들은 만세시위대를 향해 일제의 주요 시설이 위치해 있는 양성으로 가서 양성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안하였다. “양성으로 가자”고 외치는 주도자들의 제안에 다른 주민들과 함께 적극 호응해서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운 시위대열을 갖추어 횃불을 밝히고 양성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큰 목소리로 외치며 행진하였다. 양성면이 내려다보이는 성은고개의 정상에 만세시위대가 도착하자, 주도자들은 가파른 고개를 오른 후의 휴식을 취할 겸 행진을 멈추고 집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이유석·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 등이 차례로 나와 “일제의 앞잡이인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을 모두 때려 부숴야 한다”, “양성읍내에 있는 일본인도 모두 쫓아 버려야 한다”, “여러분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활동하라”는 내용의 연설로 주민들을 다시 한번 격동시켰다. 주도자들의 연설에 크게 공감해서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하여 더욱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때 양성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밤 9시 경부터 수백명의 주민들이 경찰주재소 앞에 모여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양성면의 만세시위가 끝나가던 즈음, 양성면의 시위현장에 도착하였다. 양성면의 주민들과 얼싸안고 “이제는 독립이 되었다”고 기뻐하며, 더욱 힘차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두 지역의 주민들이 연합하고, 주변의 다른 주민들도 가세하여 만세시위대의 규모는 금새 2,000여 명의 대규모로 확대되었고, 만세시위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유석·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일제 경찰의 양성주재소로 행진하여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홍창섭·최은식·남현서(南玄西) 등과 함께 돌을 던져 주재소의 창문을 깨뜨리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비품을 파괴하고, 서류상자 등의 기물을 들어내서 소각시켰다. 이어 주도자들의 지휘에 따라 우편소를 습격하였다. 조경수(趙慶洙)가 우편소 안으로 들어가 일장기를 떼어 밖으로 집어 던지자, 이유만(李裕萬)이 이를 받아 불태워 버렸다. 이에 우편소의 기물을 파괴하는데 참여하였다. 그후 지역에서 원성이 높았던 일본인 토자토 토요테(外里與手)의 상점과 고리대금업자 다카 히데토모(隆秀知)의 자택 습격에 다른 주민들과 함께 참여하는 등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만세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4월 3일 조선주차군 제79연대 3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색출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과정에서 일제에 체포되어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받은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죄, 소요죄 등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