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炯模
炯模1913. 12. 19 ~ 1941. 3.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전남운동협의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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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13년 12월 19일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 병영면(兵營面) 삼인리(三仁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성균(李成均)이다. 1931년 병영자유노동조합(兵營自由勞動組合)에 가입하였고, 1932~1934년까지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에 참여해 활동하였다. 1929년 3월 병영면의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잠시 조명산(趙明山)의 상점에서 견습공으로 일하였고, 이후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1년경 병영자유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윤주응(尹柱應) 등으로부터 지도·교양을 받고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였다. 1931년 9월 병영의 사회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오던 윤주응 등이 체포되었다. 그러자 1931년 12월 23일 박군암(朴群岩) 등과 김감년(金甘年) 집에 모여 선배의 정신을 계승하여 각자의 의식을 강화하고, 무산대중을 지도·교양하기 위해 유물사관과 사회주의 서적을 연구·토의하기로 협의하였다. 1933년 3월 초에는 김감년·조순석(趙順石)과 함께 자택에서 공산주의 혁명의 이론 연구와 피압박 인민계급의 해방에 대해 토론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해남(海南)에서 김홍배(金洪培)·오문현(吳文鉉)과 완도(莞島)에서 이기홍(李基弘)·황동윤(黃同允)이 중심이 되어, 1933년 5월 14일 해남군 북평면(北平面) 동해리(東海里)의 성도암(成道庵)에서 조직한 항일 비밀결사였다. 이 단체는 전남지역의 농민·어민·노동자와 인텔리를 포함한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을 목적으로 구원부(救援部)·사무부(事務部)·조사부(調査部)·조직부(組織部) 등을 갖추고, 기관지인 『농민투쟁(農民鬪爭)』을 발간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그 지도 범위가 완도·해남지역에 국한되었지만, 일종의 지역전위 정치조직의 성격을 지니고 출발하여 장래 전국적 차원에서의 조선공산당 조직을 전망하였다. 1933년 8월 11일 전남운동협의회는 운동 전선을 농민층에 국한시키기로 방침을 변경하고 해남군 삼산면(三山面) 구림리(九林里)에 위치한 대흥사(大興寺) 심적암(深寂庵)의 옆 계곡에서 열린 회합에서 명칭을 ‘적색농조준비위(赤色農組準備委)’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구체적 조직 방법으로 농촌 각 마을에 2~5명으로 농민반·청년반·소년반을 각각 결성하고, 후에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할 때 다시 면 단위에서 그 반들을 통합하여 각 군의 적색농조의 지부로 한다는 방침을 택하였다. 이후 강진·영암(靈岩)·완도·장흥·해남 등의 53개의 농민반과 26개의 야경단, 28개소의 야학을 설치하여, 조직 확대와 사회주의사상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완도·장흥·해남 등에서 10여 차례의 소작쟁의, 어업조합 폐지운동, 강제예금 인출투쟁 등을 지도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목적을 관철하였다. 이 일로 1934년 2월 중순 일제 경찰에게 관련자 558명이 검거되고, 그해 9월 9일 247명이 목포검사국에 송치되는 이른바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이 일어났다. 이처럼 김감년·박군암·조순석 등과 함께 공산주의 이론 연구와 무산계급 해방을 협의하였다는 이유로 1934년 2월 중순 붙잡혔고,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연루자로 구속·기소되었다.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일수 중 545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일제 경찰로부터 받은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1941년 3월 3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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