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種赫
種赫1892. 8. 11 ~ 1935. 12. 1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참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8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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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80) 1892년 8월 11일 충청남도 당진군(唐津郡)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다른 한자의 이종혁(李鍾赫) 또는 마덕창(馬德昌)이다. 참의부(參議府)에 참여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15년 김석원(金錫源)과 같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27기로 졸업하였다. 일본 육군 보병과 중위에 임관되었다가 퇴임하고 귀국하였다. 1924년 4월에는 만주로 건너가서 중국 국민군 제1방면군인 풍옥상 부대(馮玉祥部隊)에 입대하여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1922년 8월 남만주의 환런현(桓仁縣)에는 통합 독립군단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성립되었다. 통의부는 비록 남북만주의 모든 독립군 세력을 망라한 결집체는 아니었지만, 1920년 일어난 경신참변(庚申慘變) 이후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며 새로운 투쟁 방략을 모색하고 있던 남만의 독립군만이라도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시켰다는 점에서는 진일보한 성과였다. 그러나 통의부는 성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화파와 복벽파 간에 불화가 생겨 복벽주의 계통의 전덕원(全德元) 일파가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여 단체를 이탈하였다. 의군부는 이후 통의부와 잦은 마찰을 보였고, 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 채찬(蔡燦)을 비롯한 김선풍(金旋風)·최지풍(崔志豊) 등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분열되어 두 조직으로 나누어진 양 군단이 다시 통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에 채찬 등은 전 독립군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서 1923년 말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찾아가 만주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요인들과의 협의에서 서(西)로는 임시정부를 구심점으로 하여 만주의 독립군단들을 대동단결시켜야 한다는 합의점을 도출하였다. 따라서 채찬 등은 일단 통의부 의용군 제1·2·3중대와 유격대 및 독립 소대를 따로 분리시켜, 1924년 초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성립시켰다. 참의부가 성립된 직후 통의부 의용군 제5중대장 김명봉도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참의부에 가담하였다. 이때 퉁화현(通化縣)에서 김승학(金承學)·이유필(李裕弼)·이웅해(李雄海)·윤세용(尹世茸)·채찬 등과 함께 육군주만참의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재만 독립군단으로 조직된 참의부는 1920년대 중후반 만주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와 함께 3부의 시대를 열어 간 주역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독립군단 중 하나이다. 1927년 3월 참의부 군사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대일 무장 투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아울러 1927년부터 독립운동계 전반에 불기 시작했던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호응하여, 정의부와 신민부를 비롯한 그 밖의 재만 독립운동 단체와의 통합 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1928년 2월에는 참의부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김승학·김강(金剛)·차천리(車千里) 등과 함께 남만의 환런(桓仁) 지방에서 무장 활동을 전개하다가 펑톈(奉天) 주재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29년 5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고, 그 해 10월 24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34년 4월에 풀려났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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