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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浩源

浩源

1891. 4. 11 ~ 1978.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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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浩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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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公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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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한족회
  • · 광한단
  • · 조선혁명당

포상 정보

  • · 독립장(2000)

관련 사건

  • · 신빈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00) 1891년 4월 11일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장기면(長岐面) 월송리(月松里)에서 태어났다. 호는 송강(松江)이고, 이명은 이호언(李浩彦)·이효원(李孝源)·강덕재(姜德載·康德載)·삼송(杉松) 등이다. 고향에서 교원양성소를 마치고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중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고 1916년 남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조직된 한족회(韓族會)에 참여하고, 기관지 『한족신보(韓族新報)』의 편집과 발간사업을 담당하였다. 1920년 5월에는 현정경(玄正卿, 본명 玄炳槿)·이시열(李時說, 본명 李學洙)·현익철(玄益哲)·김관성(金觀聲)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고, 간의부(幹議部) 위원에 선임되었다. 랴오닝성(遼寧省) 관뎬현(寬甸縣) 향로구(香爐溝)에 근거를 두고 단원들에게 군자금 모집 방략 등을 지도하였다. 이에 광한단 소속 김준경(金俊京) 등이 국내에서 28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3월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재판에 회부된 뒤 법정에서 “일본은 반적배(反賊輩)를 협박하여 조선의 국권을 박탈하고 조선의 민복(民福)을 증진한다고 칭하며 병합 초부터 우리 민족의 종교 예술을 억압 소멸하고 농공상(農工商)을 박탈 삭자(削資)하고 3,000리 성역(聖域)은 국방, 안녕 유지라는 명목으로 현세의 지옥으로 만들었다”라고 일제의 침략상을 통렬히 반박·질타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같은 해 6월 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해 7월 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이후 감형으로 1928년 풀려났다. 풀려난 후 즉시 가족과 함께 중국 랴오닝성 신빈현(新賓縣) 왕청문(旺淸門)으로 이주하여 다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 주도 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서 설립한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 교원이 되어 항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9년 12월 화흥중학교에서 현정경·현익철 등이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창립총회를 개최할 때 이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 단체의 노동·농민·자치·군사·교육·재정 등의 정책과 당헌(黨憲) 10조의 제정을 주도하는 등 핵심적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8월 신빈현 사첨(沙尖)에서 개최된 조선혁명당 제3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상무집행위원, 선전위원회 교양부 집행위원장 등의 책임을 맡았다. 이후 「만주정세」 등의 팜플렛과 선전 전단을 제작 배포하여 남만주 지역 한인 교민들을 항일독립운동의 지원세력으로 견인하는 등 독립운동 세력 확장에 매진하였다. 1931년 국민부(國民府)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이 선양(瀋陽)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자, 그 후임으로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및 정치부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조선혁명당의 최고 책임자로서 남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조직인 조선혁명당을 이끌었다. 1932년 1월 19일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조선혁명당의 진로 및 항일무장투쟁의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신빈현 읍내 부근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당·정·군 합동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이를 탐지한 퉁화(通化) 일본영사관 경찰의 급습으로 조선혁명당 군사위원회 위원장이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보안(金保安, 본명 (金俊澤)·조선혁명군 부사령관 장세용(張世湧, 본명 (張元濟)·국민부 공안부위원장 이종건(李鐘乾, 본명 (李鐘淳) 등 핵심 간부 5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를 ‘신빈사건’이라 한다. 1932년 11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7년의 옥고를 겪고 풀려났지만, 1945년 또다시 퉁화 일본헌병대에 붙잡혔다가 일제의 패망 이후 풀려났다. 광복 이후에는 주로 교육과 한글 연구 등에 종사하였다. 1949년 중국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석권한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였다. 중국이 소수민족에 대한 자치정책을 표방하며 외면적으로는 우대정책을 실시함에 따라 1952년 지린성 산하에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세워졌고, 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편되었다. 1955년부터 1964년까지 9년 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副州長)을 맡아 민족자치 및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이른바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는 독립운동 경력이 문제가 되어 수감되는 등 큰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 동포들의 한글 보존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장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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