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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中彦

中彦

1850. 3. 13 ~ 1910.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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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中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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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계몽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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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50년 3월 13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하계(下溪) 마을(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서 첨중추부사를 지내고 이조참판에 증직(贈職)된 아버지 이만우(李晩佑)와 어머니 의성 김씨(義城金氏)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자는 중관(仲寬)이고 호는 동은(東隱)이다. 어려서 가학을 이어받았다. 특히 재종숙 이만송(李晩松)의 가르침을 받아 15세가 되기도 전에 이미 사서삼경에 능통하였다고 전해진다. 1872년 향시에 합격하고, 1879년 5월 문과에 합격하였다. 상의원(尙衣院) 직장(直長, 종7품)을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典籍, 정6품),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정6품)을 거쳐 1880년 사헌부 지평(持平, 정5품)에 올랐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황쭌셴(黃遵憲)의 『조선책략』이 국내에 유포되자, 1880년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발송한 「통문(通文)」 발의자 11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1월 25일 이 통문의 제의에 따라 안동향교에서 유림들의 집회인 도회(都會)가 열렸고, 이어서 경북 문경군(聞慶郡) 산양면(山陽面)에서 대규모 만인소(萬人疏)를 올리는 모임이 열렸다. 이 모임은 1881년 안동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라는 거대한 저항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터지고 단발령 소식이 전해지자 예안의병부대[禮安義陣] 또는 선성의병부대[宣城義陣]이라 불린 의병부대에 참가하였다. 예안에서 일어난 선성의병부대는 전국에서도 비교적 일찍 일어났다. 단발령이 전해진 직후에 「예안통문」이 발표되고 1896년 1월 25일 군사를 일으켰다. 이 통문에 서명한 사람이 모두 223명인데 7명의 이름만 전해진다. 다수가 진성 이씨로 평소 가깝게 지낸 인물인 점, 의병 간부진으로 바로 선임된 사실 등으로 보아 이 통문에 참가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성의병부대에서 진무장(鎭撫將)에 이어 전방장(前防將)을 맡아 전투에 나섰고, 큰 조카 이빈호(李彬鎬)가 참모를 맡았다. 안동·봉화(奉化)·예천(醴泉)·순흥(順興)·영주(榮州), 그리고 제천(堤川)에서 온 호좌의병부대와 더불어 상주군(尙州郡) 함창면(咸昌面) 태봉리(台封里)에 있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러 나섰다. 당시 일본군이 부산(釜山)에서 대구(大邱)를 거쳐 서울로 연결되는 병참노선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그 지점이 상주군 낙동과 태봉, 충북 수안보(水安堡)를 거쳐 충주(忠州)로 연결되고 있었다. 그래서 태봉에 주둔하던 일본군 부대를 의병들이 공격 목표로 지목했던 터였다. 선성의병부대 선발대는 1차 집결지인 안동 풍산(豐山)을 거쳐 1896년 3월 20일 예천으로 향하였다. 3월 26일 예천에서 연합의병부대의 회맹(會盟) 의식을 치렀다. 그 무렵 중군 김도현(金燾鉉), 선봉장 이인화(李仁和)와 더불어 선성의병부대 본대 300여 명을 이끌고 예안을 출발하여 연합의병부대가 머물던 문경과 상주 경계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선성의병부대는 3월 28일 산양을 지나 영주 포내촌(浦內村, 현 문경시 영순면 포내리)에 머물고, 29일 아침 일찍부터 태봉 공격에 나섰다. 태봉전투는 이틀 동안 벌어졌다. 선두에 선성의병부대가 나섰고, 풍기·순흥·영주의병부대가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일본군의 전투력이 월등하여 의병들은 밀려났다. 29일 밤 예천으로 후퇴하였다가 선성의병부대는 3월 31일 예안으로 돌아왔다. 일본군과 관군이 안동부에 불을 질러 안동 도심 천여 호의 민가를 태우고서 예안으로 밀려들었다. 이에 선성의병부대는 선성산에 산성을 개축하기도 하고 기봉(旗峰)에 굴을 파서 대비하다가 청량산(淸凉山)으로 의병부대를 옮겼다. 일본군과 관군은 의병 근거지를 없애려고 5월 31일 청량산 오산당(吾山堂)을 불태웠고, 그 전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종가에 불을 질러 건물 일부와 함께 1,400권의 문서와 책이 소실되었다. 그 일을 겪은 뒤 열흘이 지난 6월 10일에 2차 선성의병부대는 해산하였다. 3~4차 선성의병부대가 곧 일어났다. 정황으로 보면 마땅히 참가했으리라 짐작되지만 명확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을미의병이 끝나고 은거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 소식에 직접 서울로 가서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대궐에 제출하였다. 그 글에서 역사적 원수인 일본을 끌어 들인 잘못을 지적하면서, 다섯 명의 역적을 처형하라고 요구하였다. “이 다섯 역적의 머리를 베어 거리에 걸어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위조된 조약은 폐하께서 모르는 상태에서 다섯 역적이 속인 일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이신다면, 세계 모든 나라의 의혹은 저절로 해소될 것이며 전국에 걸쳐 비등해진 여론도 안정될 것입니다. (중략) 협박으로 맺은 거짓 조약들을 마땅히 폐지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상소투쟁이 결실을 맺지 못하자 다시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910년, 마침내 나라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리자 최후의 선택에 나섰다. 두문불출하며 각오를 굳혀가던 무렵, 짐작하던 대로 옆집 집안 숙부인 이만도(李晩燾)의 단식 소식이 들려왔다. 1910년 10월 10일 단식 24일 만에 이만도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날부터 조상의 사당과 산소를 찾아 인사를 드리고 단식을 선언하였다. 부인과 자녀가 만류하고 나섰지만, 뜻은 단호하였다. 더러는 용기를 치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애써 손을 내저으며 그만두라 일렀다. 단식을 시작한 다음날인 10월 11일 일제를 향해 「경고문(警告文)」을 발표하여 자신이 단식을 결행하는 이유와 목표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이 글에서 짐승 같은 무리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의리뿐’임을 강조하고, 우리 동포가 모두 여기에 매진하여 일제 강점을 용납하지 않도록 하는 초석이 되겠다는 뜻을 밝혔다. 황제와의 의리, 겨레와의 의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책임을 내걸고 단식의 길을 택한 것이었다. 단식을 시작한 지 12일째 되던 10월 21일 간소한 장례를 당부하였다. 일제 순사가 와서 강제로 음식을 권하라고 요구하자, 정신이 혼미하던 가운데서도 곁을 지키던 사람에게 “너는 저런 놈들을 빨리 쫓아내지 않고 뭘 하느냐. 내가 당장 저놈들을 칼로 베어 죽이리라.”고 서릿발 같은 기개를 보였다. 단식을 시작한 지 27일 만인 11월 5일 저녁 6시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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