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才明
才明1893. 11. 7 ~ 1976. 6.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자성군 여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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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3년 11월 7일 평안북도 자성군(慈城郡) 중강면(中江面) 중상동(中上洞)에서 태어났다. 강계(江界) 영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중강진(中江鎭) 시내의 사립학교였던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사가 되었다. 중강진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입지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 수비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당시 유력한 헌병대도 두고 있었다. 게다가 만주와의 교역을 위한 중계적 거점이므로 일찍부터 일본 상인들이 진출하였고, 시내 중평동(中坪洞) 일대는 일본인 거류지구가 신시가지로 조성되어 조선인들이 사는 구시가지와 대비를 이루었다. 이러한 지역적 환경에 더하여 사립학교 교사로서 공립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의 횡포를 겪으며 민족 감정을 키웠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같은 신성학교 교원이었던 아내 이창신(李昌信), 공립보통학교가 된 희명학교 전(前)교사였던 김인형(金仁亨),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기수였던 이기용(李基容), 신성학교 졸업생인 김종하(金宗河)·김종선(金宗先) 형제, 시내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박윤무(朴允茂)와 규합하여 함께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독립선언서는 3월 11일경에 당시 만주 린장현(臨江縣)에 이주하여 살고 있다가 중강진을 방문한 평양 대성학교 졸업생 정단(鄭丹)을 우연히 길에서 만나서 얻었다고 한다. 당시 자성군 읍내에서도 3월 15일에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주도한 시위는 그와 별도로 진행되었다. 동지들과 함께 교회 예배를 위해 모일 기독교인들을 용이하게 동원하기 위해 거사일을 3월 23일로 잡았다. 역할을 나누어 제일교회 교인들을 담당하였고, 김인형은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김종하는 신성학교 학생들을 책임지고 동원하기로 하였다. 김종하·김종선 형제에게 지시하여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 예정된 3월 23일 아침, 김종하에게 자전거 뒤에 대형 태극기를 달고 시가지를 한 바퀴 돌고 오라고 하고, 시가지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대한 암시를 주고 시위의 사기를 올렸다. 그리고 미리 계획한대로 오후 1시가 되자, 중강 다리 밑에 모인 교인과 학생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 삼창을 한 후, 가두시위에 나섰다. 시위대는 중상동(中上洞)과 헌병대 앞을 지나 건하동(乾下洞)을 거쳐 돌아오는 경로로 행진하였으며, 행진하는 동안 주민들이 더 합류하여 시위 규모가 불어났다. 시위대는 200명 가량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시위대가 일본인 거리인 중평동 신시가지로 들어가는 것은 자제하였으므로, 일본인들과의 유혈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위대의 행진이 세 바퀴째가 될 때,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현장에서 주도자 14명을 붙잡았다. 이 날 시위의 주도자로 붙잡혀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월을 받았다. 1919년 6월 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재차 상고하였다. 같은 해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고향인 자성군 여연면으로 돌아와 청년단체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6월 25일에 중강청년공신회(靑年公新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12월 2일 서울 종로(鍾路)의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거행된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창립총회에 전국 116개 단체, 124명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경찰의 요시찰인(要視察人) 명부에 올라 감시와 박해가 심하였으므로, 얼마 후 서울로 이주하여 상업에 종사하면서 교회 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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