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載炯
載炯1896. 2. 13 ~ 1961. 5.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6)
관련 사건
- · 1919년 양양군 양양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6) 1896년 2월 13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도천면(道川面) 중도문리(中道門里, 현 속초시 도문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임천리(林泉里)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함평(咸平)이며, 이명은 이동렬(李東烈)이다. 부친 이석범(李錫範)은 대한제국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를 지냈다. 형 이능렬(李能烈), 본명 : 이재훈(李載勳)은 아버지가 낙향한 후 세운 쌍천서숙(雙川書塾)에서 공부하였다. 부친과 형, 삼촌 이국범(李國範) 등은 양양군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19년 4월 5일 물치시장(沕淄市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과 6일 양양읍 만세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만세운동을 처음 계획한 인물이 바로 아버지 이석범이었다. 이석범은 만세운동 당시 서울의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양양군에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양양군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4월 4일 양양읍 만세운동을 계획한 것도 아버지 이석범이었으며, 5일 물치시장 만세운동 또한 같은 마을에 사는 이종국(李鍾國)의 집에서 모여 계획하였다. 3일 밤 아버지 이석범이 양양읍 만세운동을 지도하다가 붙잡히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삼촌 이국범과 형 이재훈이 나서서 계획을 그대로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 때 장세환(張世煥)·김영경(金英經) 등과 동참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5일 아침 일찍, 장이 서는 물치시장으로 향하였다. 장터에는 김두영(金斗榮)·추병원(秋秉元) 등 강현면(降峴面) 구장(區長)들이 나서서 동원한 주민들도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오후 10시경 형 이능렬이 직접 만든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나타났다. 쌀 가게 앞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면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선언식을 마친 뒤 주민들을 이끌고 장터를 행진하였다. 그리고 태극기를 흔들며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오전에 물치시장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마친 시위대와 함께 대포리로 향하였다. 강현면 주민들이 물치시장에서 만세운동을 펼칠 때, 도천면 주민들은 대포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때 약속대로 군중을 이끌고 대포리로 가서 도천면 주민들과 합류하여 경찰주재소로 나아갔다. 주재소에 이르러 시위대와 함께 일제 경찰들을 향하여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하며 주재소 진입을 시도하였다. 이에 주재소에 있던 일제 경찰이 절을 하며 돌아가겠다고 하자 다행히 큰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다. 이후 형 이능렬이 내일 양양읍에서 다시 모여 만세운동을 이어가자고 하자 내일을 기약하며 귀가하였다. 다음날 6일, 경찰주재소가 있는 양양읍으로 향하였다. 양양읍으로 가는 길에 일본이 만세운동을 저지하고자 1개 소대 병력을 배치하였다. 그럼에도 군중과 함께 군인들을 밀치고 양양읍으로 나아갔다. 이때 손양면(巽陽面) 주민들도 합세하면서 강현면과 도천면, 손양면 주민들까지 모두 1,300여 명의 군중이 경찰주재소 앞에 모였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평화적인 만세시위를 펼친 후 자진해서 흩어졌다. 이후 일본은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쳤고,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혔다. 이후 1919년 4월 23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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