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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載勳

載勳

1888. 8. 20 ~ 195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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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載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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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양(襄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강원도 양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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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양양군 강현면
  • · 도천면
  • · 양양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8년 8월 20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도천면(道川面) 중도문리(中道門區, 현재 속초시 도문동)에서 이석범(李錫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평(咸平)이며, 이명인 이능렬(李能烈)로 더 많이 알려졌다. 대한제국 시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군부주사(軍部主事) 겸 군기창기수(軍器廠技手)를 지낸 부친은 일제에게 강제 병합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쌍천서숙(雙川書塾)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서숙에서 한학을 공부한 이후 한서(翰西) 남궁억(南宮檍)이 양양군수로 있을 때 세운 현산학교(峴山學校)에서 신문화를 접하였고, 경성공업전문학교(京城工業專門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4월 5일과 6일 강현면(降峴面) 물치시장(沕淄市場)과 양양면(襄陽面)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부친 이석범은 고종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돌아와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마을에 전하였다. 그리고 양양읍 만세운동 준비를 지도하던 부친이 4월 3일 붙잡히자, 삼촌 이국범(李國範), 도천면의 김영경(金英經), 강현면(降峴面)의 장세환(張世煥) 등과 주축이 되어 시위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4월 4일 양양읍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던 날 저녁, 중문도리 이종국(李鍾國)의 집에서 이국범·김영경·장세환 등을 만나 도천면과 강현면 주민들을 중심으로 다음 날인 5일에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그날 밤 이종국의 집에서 밤늦게까지 시위 때 쓸 대형 태극기 2기를 만들었다. 김영경과 장세환은 마을 구장(區長)들에게 만세계획을 알리며 주민들을 동원하도록 하였고, 대포리(大浦里)의 박사집(朴士集), 부월리(扶月里)의 이종순(李鐘淳)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강현면에서는 박제범(朴齊範)·윤순범(尹順範)·김창렬(金昌烈) 등 마을 구장들이 주민 동원에 앞장섰다. 거사 당일인 4월 5일 아침, 태극기를 숨기고 물치시장으로 향하였다. 시장에 강현면 주민들이 모두 모이자 구장들은 준비한 태극기를 주민과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구장들이 앞장서서 주민들을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장터를 행진하였다. 이윽고, 오전 10시경 옥양목으로 만든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 앞에 섰다. 쌀가게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선언식을 마치고 선두에서 주도자들과 함께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군중도 뒤따르며 한목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장터를 행진하며 시위를 펼쳤다. 물치시장에서 시위를 마친 후 주도자들과 함께 계획대로 도천면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하고 있던 도천면 대포리로 가서 합세하였다. 그날 오후, 대포리 경찰주재소 인근에는 강현면과 도천면 주민, 시위에 참여한 군중 등 1,000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군중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너희 나라로 가라”고 외치며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당시 주재소 수석으로 있던 이시다(石田喜三郎)가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절을 하며 돌아가겠다고 하자, 군중은 주재소로 진입하지 않고 인근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내일 다시 양양읍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구속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자”고 제의하였다. 이 말에 주도자들과 군중은 다음날을 기약하며 모두 해산하였다. 4월 6일, 아침 일찍 양양읍으로 향하였다. 양양읍 입구 연창(連昌)에 이르렀을 때 일본이 미리 군대를 배치하여 길을 막았다. 군중과 같이 군인들의 저지에도 굴하지 않고 이들을 밀치고 읍내로 진입하였다. 읍내에는 강현면과 도천면 주민들뿐만 아니라 인근 마을 손양면(巽陽面) 주민들도 합세하여 전날보다 많은 1,300여 명이 운집하였다. 이에 힘입어 맨 앞에서 군중을 이끌고 양양경찰서로 나아갔다. 경찰서에서 도착한 뒤 경찰들을 향하여 “일본으로 물러가라”고 외쳤고, 경찰서장은 일본으로 물러가겠다고 하며 만세만 부르고 돌아갈 것을 사정하였다. 이에 만세운동을 펼친 후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관련자 검거에 나선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고 태극기도 모두 압수당하였다. 1919년 4월 23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6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었지만, 다시 징역 1년 8월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면서 “한일병탄으로 우리 민족이 고통을 받고 자유를 박탈당하였으며, 민족차별을 당하였기에 정의 인도와 자유 양심에 의거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는다”라고 항변하였지만, 그해 8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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