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國
鍾國1876. 6. 23 ~ 1940. 3. 2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1991년 양양군 도천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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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2) 1876년 6월 23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도천면(道川面) 중도문리(中道門里, 현 속초시 도문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5일 양양군 도천면 대포리(大浦里)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민들을 이끌었다. 1919년 3월 서울 만세운동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자 각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양양군에서도 고종의 장례식에 참례하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한 유학자 이석범(李錫範)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왔으며, 개성(開城)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에 재학 중이던 조화벽(趙和璧) 또한 3월 말경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인 양양으로 돌아왔다. 양양에서는 크게 이석범을 중심으로 한 유학자 계열과 조화벽이 중심이 된 기독교 감리교 계열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결과 4월 4일 양양읍 장날에 처음으로 양양군에서 만세운동이 펼쳐지게 되었다. 4월 3일 밤 양양읍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이석범이 붙잡히자, 이석범의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능렬(李能烈, 본명 이재훈(李載勳))이 주축이 되어 계획대로 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양양읍에서 만세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나던 4월 4일 저녁, 자택에 이국범·이능렬·김영경(金英經)·장세환(張世煥) 등과 함께 모였다. 그 자리에서 다음 날 강현면(降峴面)과 도천면 주민들을 중심으로 물치시장(沕淄市場)과 대포리에서 각각 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강현면은 김영경이, 도천면은 장세환이 주민들을 동원하기로 하고, 중도문리는 이국범·김영경, 대포리는 박사집(朴士集), 부월리(扶月里)는 이종순(李鐘淳)이 맡기로 하였다. 이능렬은 시위 때 쓸 대형 태극기 2장을 만들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강현면에서는 김대선(金大先)·김진선(金振璇)·김철기(金鐵起) 등 마을 구장들이 중심이 되어 주민들을 동원하는 등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거사 당일인 4월 5일 아침 일찍 경찰주재소가 있는 대포리로 향하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한 도천면 주민들도 대포리로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약속 장소인 대포항에 주민들이 모두 모이자 군중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시위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대포항 주변을 행진하였다. 오후 무렵, 오전에 물치시장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던 강현면 주민들이 대포리로 와서 합류하였다. 이국범·이능렬·박봉래(朴鳳來) 등 주동자들과 함께 1,000여 명의 주민들을 이끌고 경찰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 부근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펼쳤다. 일제 경찰에게 “너의 나라로 돌아가라”라고 외치면서 주재소 안에 들어가 기물과 공문서를 파기하려 하였다. 이에 주둔하고 있던 경찰과 마찰이 일어나면서 이춘재(李春在) 등과 같이 현장에서 붙잡혔다. 시위가 격렬해질 것을 우려한 주재소 수석 석전희삼랑(石田喜三郎)이 돌아가겠다고 하며 연신 절을 하자 시위 군중은 주재소를 공격하지 않고 물러났다. 이때 이능렬이 나서서 내일 양양읍에서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자고 하자 군중도 다음 날을 기약하며 자진하여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게 붙잡힌 후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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