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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根

鍾根

1897. 8. 20 ~ 1957. 6.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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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鍾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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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울산(蔚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울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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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울산군 하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7년 8월 20일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하상면(下廂面) 남외리(南外里, 현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4일과 5일 울산군 하상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울산군 하상면에는 서울에서 유학 중이었던 한명조(韓命祚)와 이영호(李永浩)를 통해 만세시위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하상면의 청년회 간부 이현우(李鉉禹)·이종욱(李鍾旭)·이문조(李文祚)·박영하(朴永夏)·양석룡(楊錫龍)·김장수(金長壽)와 함께 1919년 4월 4일 하상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들과 함께 자신의 집과 박영하의 거주지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고, 혈서로 ‘결사보국(決死報國)’을 서명함으로써 만세시위의 결의를 다졌다. 4월 3일에는 주도자들을 집에 모아놓고 만세시위를 위한 모임을 가졌다. 하상면사무소 등사판의 고장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할 수 없게 되자, 결국 박영하의 집에서 카본 복사 용지를 이용해 만세시위에 배포할 독립선언서 200장을 작성하였다. 청년회의 양석룡(楊錫龍)과 이종룡(李鐘龍)은 사람들을 이끌고 태극기 500장을 제작하였으며, 종이와 명주에 ‘구대한국독립만세(舊大韓國獨立萬歲)’,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라고 적힌 대형 깃발을 제작하였다. 4월 4일 오전 9시부터 청년회 회원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청년회 회원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일신학교(현재 병영초등학교)로 모였다. 오전 11시 40분 무렵 양석룡이 ‘대한독립만세’가 적힌 대형 깃발을 들자, 일신학교에 함께 집결한 청년회 회원과 시위대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청년회가 중심이 되어서 시위대를 이끌고 서리(西里), 동리(東里), 남외리(南外里), 산전리(山田里)를 행진하였다. 그러자 만세시위에 동조하는 주민들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2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일제 군경은 현장에 출동해서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며 구타하였고, 그 과정에서 14명이 울산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때 이문조·이종필(李鍾弼)과 함께 곽남부락(郭南部落)의 김세진(金世鎭) 집으로 피신하고, 그들과 함께 다음 날인 5일 만세시위를 재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문성초(文星超)·윤학이(尹學伊)·최현구(崔鉉玖)·황정달(黃丁達)·백봉근(白鳳根) 등에게 만세시위를 다시 전개하겠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4월 5일 이른 아침부터 일신학교 부근에 만세시위 소식을 접한 마을 주민들이 집결하였다. 오후 3시 무렵 이문조는 일신학교에서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현수막을 들었다. 시위대를 인솔해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일부 주민들은 지붕 위에 올라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는 8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로 행진하자 일제 군경은 총칼을 앞세우며 무력 진압을 시도하였다. 이에 맞서 시위대는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일제 군경의 진압에 저항하였고, 엄준(嚴俊)은 육박전을 시도하면서 일제 군경의 총기와 경찰의 대도를 탈취하고자 하였다. 일제 군경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를 시작하였고, 엄준·문성초(文星超)·김응룡(金應龍)·주사문(周士文)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송근찬(宋根讚)·김규식(金圭植)·김두갑(金斗甲)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차인선(車仁善)·윤학이(尹學伊)·김규석(金圭錫) 등은 시위 현장에서 순국한 인사들의 시신을 황방산록(黃坊山麓)에 안장하였다. 이후 하상면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출옥 이후 ‘기미계(己未契)’를 조직해서 만세시위 당시 서거한 인사들의 제사를 지냈다. 해방 이후 ‘기미계’는 ‘3·1봉제회(奉祭會)’로 개편되었으며, 삼일사(三一祠)라는 사당을 세워서 사망자들을 추모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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