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宗植
宗植1877. 11. 17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수안군 수안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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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7) 1877년 11월 17일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수안면(遂安面) 석교리(石橋里)에서 태어났다. 천도교인으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3일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천도교 중앙총부는 지역 단위 만세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각 지역의 천도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기로 하였다. 이에 천도교 중앙총부의 월보과장(月報課長) 이종일(李鍾一)은 황해도 곡산군(谷山郡)에 거주하는 이경섭(李景燮)에게 만세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경섭은 3월 1일 저녁 수안군 수안면 석교리(石橋里)의 수안천도교구를 방문하여 교구장 안봉하(安鳳河)를 비롯한 천도교 인사들에게 독립선언서 70부를 전달하면서 수안군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수안군 천도교 인사들은 3월 2일 수안천도교구실에서 모임을 갖고, 3월 3일에 수안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그날 오후 일제 헌병이 수안천도교구를 급습해서 독립선언서를 압수하고 안봉하를 비롯한 수안군 천도교 인사들을 연행하였다. 일제 헌병의 연행을 피한 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禎)·한청일(韓淸一)은 관내의 천도교인들을 독려해서 3월 3일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재차 결의하였다. 수안군 대천면(大千面) 시리원(柴里院)에 거주하는 오관옥(吳觀玉)은 천도교 전도사 이동욱(李東郁)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동욱 역시 주위의 천도교인들에게 수안읍 만세시위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때 이동욱의 권유를 받고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3일 수안면 만세시위는 새벽 6시부터 시작되었다. 시위대 130~140명은 이영철·한청일·홍석정의 지휘 아래 독립을 외치면서 수안면 일대를 행진하였다. 그리고 수안헌병분대로 진출한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오전 11시경 이동욱과 오관옥이 이끄는 100여 명의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독립을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로 진출하였다. 시위대는 한국이 독립되었기에 헌병분대는 퇴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헌병분대 경내로 진입하였다. 그러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하였다. 일제의 사격 소식이 전해지자, 오후 1시경 홍석정·한청일·오관옥은 시위대 150여 명을 이끌고 독립을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로 진출하여 한국이 독립되었기에 헌병분대는 퇴거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시위대가 헌병분대 정문을 돌파하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였다. 일제의 발포로 시위대 선두에 있었던 홍석정과 한청일·오관옥은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일제는 수안군 일대에 소대 및 중대 병력을 증파하여 시위 확산을 차단하는 한편 수안면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을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동지들과 함께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이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0년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 3월(미결구류일수 중 45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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