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俊基
俊基1894. 2. 13 ~ 1962. 5. 2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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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4년 2월 13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현삼(李玄三)이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에서 진행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주민들은 1919년 4월 1일부터 다음 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연합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의 행정구역개편에 의해 1914년 안성군으로 통합되기 전까지 구 양성군(陽城郡)에 소속되어 있던 원곡·양성 지역은 그 이후에도 서로 간에 같은 지역이라는 연대의식이 매우 강하였다. 이는 4월 1일의 매우 격렬한 연합 만세시위가 전개될 수 있었던 하나의 배경이었다. 1919년 4월 1일 원곡면과 양성면의 연합 만세시위는 원곡리(元谷里)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이희용(李熙龍)·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의 이양섭(李陽燮) 등이 주도하였다. 이때 이유석과 홍창섭에게 “오늘 밤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라는 내용을 전달받고,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날 오후 만세시위 참여를 결의한 200여 명의 칠곡리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만세시위가 시작될 무렵 면사무소 앞에 모인 원곡면의 주민들은 무려 1,000여 명의 규모였다.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면사무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만세시위의 기세가 고조되자, 이유석과 홍창섭은 면사무소 안에 있던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면사무소의 직원들을 밖으로 끌어내 태극기를 쥐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였다. 1,000여 명의 대규모 만세시위의 기세에 눌린 남길우 등은 저항하지 못하고, 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만세시위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고, 만세시위의 주도자들은 “양성으로 가자”라고 외쳤다. 양성에는 일제의 경찰주재소, 우편소 등의 주요 시설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시위가 더욱 효과적일 것이며, 양성면의 주민들과 연합하면 더욱 위력적인 만세시위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에 즉각 호응하여 면장 남길우를 선두에 세운 행진대열을 갖추어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만세시위대의 행렬이 원곡면과 양성면을 구분하는 성은고개의 정상에 도착하자, 이유석·홍창섭 등의 주도자들은 양성에서의 새로운 만세시위를 앞두고 대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행진을 멈추고 집회를 열었다. 이유석을 시작으로 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이 차례로 주민들 앞으로 나와 “일제의 앞잡이인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을 모두 때려 부숴야 한다”, “양성읍내에 있는 일본인도 모두 쫓아 버려야 한다”, “여러분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활동하라”라는 내용을 연설하며 양성으로 들어가기 전 주민들을 다시금 격동시켰다. 이와 같은 연설을 듣고 크게 공감하여 주변에서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하고, 다시 시위대열을 갖추어 더욱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당시 양성면에서도 밤 9시부터 수백 명의 주민들이 일제 경찰의 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 즈음 성은고개 방향에서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들려오고, 양성 방향으로 움직이는 횃불들이 보였다. 원곡면의 만세시위대였다. 양성면의 주민들은 원곡면의 만세시위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원곡면의 주민들이 양성면 동항리(東恒里)의 양성주재소 앞에 도착하자, 두 지역의 주민들은 곧바로 합류하여 서로 얼싸안고 기뻐하며 더욱 소리 높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2,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된 만세시위대와 함께 이유석·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가장 먼저 일제의 경찰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유석과 홍창섭 등이 솔선하여 주재소로 돌을 던지며 공격하라고 독려하였다.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이인군(李仁君)·홍경운(洪敬云)·최창용(崔昌鎔) 등과 함께 준비한 돌을 주재소를 향해 던지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일제 경찰들이 도주하자 남현서(南玄西)·이유만(李裕萬)·홍창섭 등은 주재소의 기물에 불을 붙여 건물 전체를 소실시켰다. 이어서 우편소로 행진하여 만세시위대의 주민들과 함께 전신선을 끊고, 전신주를 넘어뜨려 일제의 통신을 방해하였다. 우편소 주변에 민가가 많았기 때문에 건물 안의 집기만을 들어내서 불태웠다. 또 양성면사무소로 행진하여 기물을 모조리 파괴하였다. 그후 양성면에서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잡화상 상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하여 가구와 물품 등을 소각하였다. 다음 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원곡면으로 돌아와 해산하였다. 일제는 원곡면과 양성면에서의 격렬한 만세시위 소식을 접하고, 4월 3일 경찰이 아닌 한국주둔 일본군 제20사단 보병 제40여단 제79연대 3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인정되어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후 이유석·홍창섭 등과 함께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을 관할 재판소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으로부터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건조물 소훼죄, 소요죄 등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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