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李俊培

俊培

1878. 10. 22 ~ 미상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俊培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평남 강서(江西)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강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국장(2007)

관련 사건

  • · 1919년 강서군 반석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7) 1878년 10월 22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반석면(斑石面) 반육리(斑六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4일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上四里)에 있는 사천시장(沙川市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사천시장의 만세시위는 같은 날 오전에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에 있는 원장시장(院場市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서 시작되었다.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와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는 각각 강서군과 대동군에 속하였지만 장날이면 서로 왕래가 빈번하였다. 장로교 소속 교회도 네 곳이 있었는데 서로 활발히 교류하였다. 원장리에는 원장교회(院場敎會)가 자리잡고 있었다. 원장교회에서 남쪽으로 3km 쯤 떨어진 산수리(山水里)에는 산수리교회(山水里敎會)가 있었다. 상사리에는 반석교회(盤石敎會)가 있었고 여기서 10km 떨어진 반석면 반육리에는 사천교회(沙川敎會)가 자리하고 있었다. 원장시장에서의 시위 계획은 반석교회 장로이자 반석학교를 설립 운영하던 조진탁(曺振鐸) 장로가 3월 1일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거행된 독립선포식과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조진탁은 귀가길에 원장교회에 들려 장로인 고지형(高志亨)·윤상열(尹相悅)·차현구(車玄九)를 만나 평양에서 일어난 독립선포식과 만세시위를 설명하고 원장교회와 반석교회는 물론 산수리교회와 사천교회와 함께 원장 장날인 3월 4일의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원장교회 간부들은 원장교회 부설 사립합성학교 교감인 임이걸(林利杰) 장로와 산수리교회 조승익(曺承翊) 장로에게 만세시위 계획을 알렸다. 차현구는 반석교회 최능현(崔能賢) 장로와 백이옥(白履玉) 영수에게 이 사실을 연락하였다. 최능현은 사천교회 송현근(宋賢根) 목사에게 거사 계획을 알렸다. 송현근은 김해진(金海鎭)의 집에 교회 간부를 소집하여 사천시장에서 별도의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하지만 헌병보조원에게 발각되어 김해진을 비롯한 10여 명이 붙잡혔다. 송현근은 다행히 검거를 피해 조진탁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1919년 3월 4일 오전 10시 원장 합성학교 운동장에서는 원장교회, 반석교회, 산수리 교회 교인 1,000여 명이 모여 독립선포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포식을 마친 시위대는 대형 태극기를 높이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향해 행진하였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합성학교 교정으로 돌아올 때는 원장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합세하는 등 많은 군중이 뒤를 따랐다. 최능현과 송현근은 합성학교 운동장에 돌아온 군중에게 사천시장의 시위 준비가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체포된 사실을 공표하고 유치장에 갇힌 동지들을 구하러 가자고 호소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청년이 선두에 서고 노인과 여성들이 뒤따르며 헌병대가 있는 사천시장으로 향하였다. 이 때 이웃집 소가 병에 걸린 것을 살펴보러 가다가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사천시장에 거의 도착할 무렵, 헌병분견소장인 사토 미타로(佐藤實太郞)와 헌병보조원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사상자가 나면서 격분한 시위 군중은 돌을 던지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결국 사토는 분견소에 몸을 숨기고 계속 총을 쏘았고 헌병보조원들은 도망을 갔다. 시위 군중이 분견소에 불을 지르자 뛰쳐나온 사토는 도망가던 중 헌병보조원과 함께 시위대에 발각되어 사망하였다. 이 날 시위에서 19명이 총에 맞아 죽었고 40여 명이 다쳤다. 시위대는 해산하였지만, 평양 헌병대가 파견한 헌병과 경찰이 집집마다 수색하며 특히 남성 기독교인을 주로 검거하였다. 붙잡힌 사람들은 평양경찰서와 강서경찰서에서 취조하였는데 결국 기소자 49명의 한 사람으로 평양검사국에 송치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헌병 살해에 연루되었다며 이른바 살인죄, 방화죄,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11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