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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昌淳

昌淳

1894. 1. 27 ~ 1952.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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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昌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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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昌寧)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창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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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대구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94년 1월 27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대지면(大池面) 석동(石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용이(李龍伊)이다. 대구 사립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하였다. 1919년 3월 8일 대구부(大邱府) 시장정(市場町, 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서문시장(西門市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은 대구지역 장로회 목사인 이만집(李萬集)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만집은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고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한 후에, 기독교인 김태련(金兌鍊)·정재순(鄭在淳)과 계성학교 교사인 김영서(金永瑞)와 협의하여 같은 날 오후 3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서문시장에는 계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특히 계성학교 교사인 김영서·백남채(白南埰)·최상원(崔相元)·권의윤(權義允)·최경학(崔敬學)은 전교 학생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고,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30여 명의 재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약 700~800명의 군중이 집결하자, 이만집은 “지금은 한국이 독립할 시기로서 각자가 독립을 희망함을 외치면 자연히 독립하게 될 것이니 만세를 소리높이 부르자”라고 연설하였다. 이에 크게 공감하고, 김태련이 집에서 등사한 독립선언서 200장을 받아서 계성학교 학생과 군중에게 배부하였다. 그리고 ‘한국독립만세’ 등을 적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와 함께 서문시장을 출발해 본정(本町), 경정(京町)을 거쳐 동성정(東城町)까지 행진하였다. 이때 출동한 대구경찰서와 대구헌병분대에 의하여 수백 명의 시위대와 함께 강제 연행되었다.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그해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옥고를 겪었다. 1920년 일제의 감시를 피해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대연리(大淵里)로 이동하여 은신하였다. 대연교회에서 2년간 야학을 운영하였는데, 이곳에서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과 독립정신을 가르쳤다. 야학은 대연강습회로 이어졌고, 후일 대연 공립국민학교(현 대연초등학교)의 설립 모체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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