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致濟
致濟1865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1919년 수안군 수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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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9)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오동면(梧洞面) 갈현리(葛峴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20년 당시 나이가 56세로 1865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3일 수안군 수안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수안군의 독립운동은 서울의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독립선언서와 만세운동 소식을 전달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수안군 천도교 교구장 안봉하(安鳳河)와 한청일(韓淸一) 등은 독립선언서를 군내 각지에 전달하고, 각 면의 천도교도를 동원하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1일 밤 한청일(韓淸一)이 찾아와 3월 3일 수안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고 수안헌병분대를 접수할 것이라며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자, 동참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2일 오후 3시경 수안헌병분대 헌병들이 수안천도교구실을 급습해 독립선언서를 압수하고 현장에 있던 천도교도를 구금하였지만, 다행히 체포되지 않은 한청일 등을 중심으로 계획대로 만세시위가 추진되었다. 3월 3일 오전 6시 읍내 천도교구 앞에 모인 13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6시 30분경 시위대와 함께 수안헌병분대로 나아가 “우리는 이미 조선독립 선언을 했으니 속히 이 분대를 우리에게 넘겨야 한다”며 헌병 분대의 퇴거를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자 헌병 분대장 등이 해산을 요구하고 나서, 시위대와 함께 일단 해산하였다. 오전 사이 천도교구실로 모여든 100여 명의 시위대가 오전 11시경 다시 수안헌병분대로 찾아가 즉각적인 퇴거를 주장하며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였지만, 헌병들의 발포로 일단 해산하였다. 일제 헌병들의 발포 소식을 듣고, 오후 1시경 한청일 등이 규합한 150여 명과 함께 다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한국의 독립과 헌병분대 퇴거를 외치며 수안헌병분대로 행진한 후, 방어를 뚫고 헌병분대 경내로 진입하였다. 일제 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시위대는 흩어졌다. 3월 4일 소대와 중대 병력이 증파되어 시위 참여자를 색출해내는 과정에서 붙잡혀 이른바 내란죄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그해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소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 3월(미결구류일수 중 45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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