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夏榮
夏榮1872. 9. 18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8)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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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8) 1872년 9월 18일 평안남도 진남포부(鎭南浦府) 신흥리(新興里)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감리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1919년 3월 1일 진남포부 신흥동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진남포 만세시위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승훈(李昇薰)의 제안과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승훈은 진남포에서 광무소(鑛務所)를 운영하며 ‘105인사건’ 때 함께 투옥되었던 임치정(林蚩正)을 방문해 서울과 평양(平壤) 일대에서 만세운동이 거행될 것임을 알리고, 진남포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임치정, 삼숭학교장(三崇學校長) 홍기황(洪基璜), 노윤길(盧允吉) 등 감리교(監理敎) 인사들은 진남포 만세시위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2월 28일 이승훈의 연락을 받고 노윤길은 평양으로 가서 윤원삼(尹愿三)으로부터 독립선언서 500장을 받아, 다음날인 3월 1일 아침 진남포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남포의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이들과 서울·평양과 마찬가지로 3월 1일 거족적으로 만세시위를 시행하기로 결의였다. 신흥리 감리교회 광장 앞에서 고종의 봉도식(奉悼式)을 개최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기로 하고, 이와 동시에 천도교(天道敎) 측에도 연락을 취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제안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신흥동 감리교회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간단하게 봉도식을 마치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고, 5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며 큰 시가로 이동하였다. 큰 시가에 도착한 후 시위대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다시 만세를 고창하면서 행진하였다. 하지만 곧이어 일제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해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아울러 70~80여 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일자미상일에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7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0월을 다시 받았다. 다시 상고하며 “마땅히 행해야 할 의로운 거사”라고 주장하였지만, 그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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