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漢榮
漢榮1899. 12. 6 ~ 1945. 4. 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 원곡면
- · 양성면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9년 12월 6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안성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1일 오후 ‘오늘 밤 모두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자’는 계획을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등으로부터 전달받고, 같은 마을의 이상옥(李相玉)·이병오(李丙五)·이상근(李相根) 등의 주민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동의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약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자, 이유석·홍창섭, 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이유석·홍창섭 등 주도자들은 만세시위대를 향해 ‘양성으로 가자’고 외쳤다. 시위대열을 형성하여 선두에 면장 남길우를 앞세우고, 양성면(陽城面)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행진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 경계인 성은고개의 정상에 만세시위대가 도착하자, 이유석 등 주도자들은 행진을 멈추고 연설한 후 다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양성면에서도 이날 밤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오후 9시경부터 수백명의 양성면 주민들이 경찰주재소 앞에 모여 일제 경찰을 향해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던 중, 원곡면의 시위대가 합류하였다. 시위대의 다른 주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먼저 일제 경찰주재소로 행진하여 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참여하였다. 최은식 등과 함께 일제의 경찰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집기와 기물 등을 파괴하였다. 주민들의 습격에 놀란 일제 경찰들이 도주하자, 홍창섭 등의 지휘에 따라 주재소 건물에 불을 질러 소실시켰다. 그후 양성우편소로 행진하여 돌을 던지고, 이상옥 등과 함께 우편소 안으로 들어가 의자와 책상을 부수고, 기물과 서류 등을 가지고 나와 소각시킨 후, 평소 지역에서 원성이 높았던 일본인 토자토 토요테(外里與手) 상점으로 만세시위대와 함께 행진하였다. 여기에서도 시위대의 선두에서 이상옥과 함께 상점 안의 의자를 꺼내 불태워 버리는 등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새벽 4시경 원곡면으로 귀환하여 원곡면 면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지는 등의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해산하였다. 일제는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4월 3일 조선주차군 제79연대 30여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 색출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유석·홍창섭 등과 함께 내란죄로 고등법원의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등으로 징역 2년 6월(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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