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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好用

好用

1893. 1. 23 ~ 1951.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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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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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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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固城)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고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단성청년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단성면 만세운동
  • · 단성청년회 활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93년 1월 23일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 고성읍(固城邑) 무량리(武良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호남(李好男), 한자를 달리 한 이호용(李好勇)이다. 산청군(山淸郡) 신등면(新等面) 단계리(丹溪里)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산청군 만세운동은 김상준(金相峻)·윤규현(尹圭鉉)이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와 정태륜(鄭泰侖)·김상호(金相浩)·권숙린(權肅麟) 등과 함께 만세시위 계획을 논의하면서 준비되었다. 3월 18일 만세시위 준비 모임에 참여하여 동료들과 함께 3월 20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또한 인근 지역에 격문을 부착하고 만세 시위에서 사용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기와 손에 들 태극기를 제작하는데도 힘을 보탰다. 3월 20일 정태륜 등과 함께 신등면 단계리 시장으로 갔다. 오후 2시 무렵부터 만세 시위를 시작하였고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시위에 동조하는 군중 500여 명 이상이 모여 만세를 따라 불렀다. 시위대를 이끌고 시장을 행진한 이후, 단성면 헌병주재소로 이동하였다. 헌병주재소 앞에서 신등면 시위에서 일본군 헌병대가 체포하여 끌고 간 20여 명의 시위대에 대한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본군이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진압할 때 피신하였으나, 분을 참지 못하고 동료들과 함께 다음날 재차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만세시위를 재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1일 오후 1시 무렵부터 장날을 맞이한 단성면 성내리(城內里)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재개하였다. 전날 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함께 시장으로 향하였다. 뜻을 함께하기 위해 모인 만세시위 군중은 약 1,000명을 헤아렸다. 3월 19일 이후 누적된 일본군의 폭력적 진압에 대한 분노로 만세시위는 훨씬 더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돌과 몽둥이, 곤봉 등을 손에 쥔 군중도 있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동료들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하여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성내리 시장을 돌았다. 그리고 구속자 석방을 위해 단성면 헌병주재소로 나아갔다. 시위 군중을 대표하여 정태륜 등과 함께 전날 일본군 헌병대가 체포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헌병대는 요구를 무시하고 강제 진압과 체포에 나섰다. 군중의 만세시위는 보다 격렬해졌다. 헌병주재소를 향해 투석전을 전개하고, 몽둥이·곤봉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진입하려고 하였다. 일본군 헌병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11명이 사망하였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에 붙잡혔다. 1919년 8월 10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즉각 항소하였으나, 그해 9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단성청년회(丹城靑年會)에 참여하여 민족운동을 이어나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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