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弘福
弘福1882. 2. 13 ~ 1945. 2.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가평군 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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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2년 2월 13일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북면(北面) 이곡리(梨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5~16일 경기도 가평군 북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4일 가평군 북면 목동리의 이윤석(李胤錫)과 정흥룡(鄭興龍)이 가평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고 입수한 독립선언서 2통을 각각 이만석(李萬錫)·정재명(鄭在明)에게 전달하여 북면 주민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에 동료 18명과 함께 만세운동 계획에 적극 찬동하여 군중을 회합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3월 15일 130여 명의 이곡리 주민들과 함께 동리 구장(區長) 홍세구 집으로 출발하였다. 홍세구 집 앞에서 ‘조선독립’이라는 글자가 쓰인 태극기를 입수한 다음 목동리에서 온 시위대와 합류하여 북면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오전 9시경 북면 각 동리에서 모인 시위대와 함께 북면사무소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후 가평 읍내를 향해 출발하였다. 약 500명에 달하는 시위대 선두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열을 만들어 가평 읍내를 향하는 도중 북면 이곡리 답현고개에서 가평군수가, 군내면(郡內面) 마장리(馬場里)에서는 헌병소장이 해산을 명령하고 제지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고 정오 무렵 가평 읍내로 진입하였다. 이후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와 함께 가평군청, 가평공립보통학교, 가평금융조합, 가평헌병분견소, 가평우편소, 군내면사무소 등의 주요 기관들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주도자인 이윤석·정흥룡 등 10여 명을 체포하였다. 3월 16일 장기영이 전날 시위로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시킬 계획을 세우자 이에 찬동하여 200여 명의 마을 주민들과 함께 북면 목동리에 다시 모였다. 장기영의 인솔 아래 가평헌병분견소로 향하는 도중 목동리 성황당 산길인 제당현(祭堂峴) 고개에서 경성 헌병분대 오장(伍長) 마쓰모토 긴조(松本銀藏)가 이끄는 헌병 분대와 조우하였다. 마쓰모토 긴조가 시위대에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이에 불응하고 시위대와 함께 돌맹이와 기와장을 던지며 헌병들과 사투를 벌였다. 시위대의 격렬한 반격에 도주한 마쓰모토 긴조는 이후 보병대의 지원을 받아 다시 시위대를 공격하였다. 그 결과 시위대는 강제로 해산되었으며 장기영을 비롯한 주도자 8~9명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후 항소하였으나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다가 7개월 후인 1920년 4월 28일 이른바 은면(恩免)을 받아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노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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