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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華榮

華榮

1879. 9. 12 ~ 1961. 1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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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華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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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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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4.1)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9년 9월 12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경백(敬伯)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4월 1일부터 4월 2일 새벽까지 전개된 원곡면과 양성면(陽城面)의 연합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4월 1일의 연합 만세시위는 칠곡리의 이유석(李裕奭)과 홍창섭(洪昌燮), 외가천리(外加川里)의 최은식(崔殷植)과 이희용(李熙龍), 이근수(李根洙), 내가천리(內伽川里)의 이덕순(李德順), 죽백리(竹栢里, 현재의 平澤市 竹栢洞)의 이양섭(李陽燮) 등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만세시위 당일이었던 이날 오후 이유석과 홍창섭으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나라의 독립이라는 취지에 공감하여 조경수(趙敬秀)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원곡면의 곳곳에서 원곡면사무소 앞에 집결한 약 1,0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유석과 홍창섭 등은 시위대의 기세를 배경으로 면장 남길우(南吉祐)와 직원들을 면사무소에서 밖으로 끌어내 그들에게 태극기를 쥐어주고 ‘대한독립만세’를 함께 외치게 했다. 남길우 등 면사무소 직원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기세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양성으로 가자”고 시위대를 향해 외쳤다. 과거 양성군의 군청소재지였던 양성에는 경찰주재소와 우편소 등 일제의 주요 시설들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석·홍창섭 등의 외침에 호응하여 주변의 주민들과 대열을 갖추었다. 주도자들의 지휘에 따라 횃불을 밝히고, 면장 남길우를 선두에 세워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시위대의 행렬이 원곡면과 양성면을 구분하는 경계인 성은고개에 이르자, 이유석 등의 주도자들은 일단 행진을 멈추고, 시위 분위기를 재정비하기 위해 집회를 열었다. 이유석이 주민들 앞에 먼저 나서서 “양성주재소로 가서 일본순사들을 끌어내어 같이 대한 독립만세를 부릅시다”라고 연설하였다. 이후 홍창섭·이덕순·이근수·최은식 등이 서로 번갈아가며 일제의 식민통치를 규탄하면서 “일제의 앞잡이인 면사무소, 주재소, 우편소 등을 모두 때려 부숴야 한다. 그리고 양성읍내에 있는 일본인도 모두 쫓아 버려야 한다”,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라”는 등의 내용으로 연설하였다. 이와 같은 주도자들의 연설에 크게 공감하고 격동되어, 돌멩이와 몽둥이 등을 준비하여 다시 시위 대열을 형성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양성면에서도 이날 밤 9시 경부터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수백 명의 주민들이 경찰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동안 시위를 전개한 양성면 주민들이 해산하려던 즈음, 성은고개로부터 횃불을 밝히고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양성면 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는 원곡면의 시위대를 목격했다. 양성면 주민들은 해산을 중지하고 원곡면의 시위대와 합류하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두 지역 주민들의 연합으로 시위대는 2,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이유석·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우선 일제 경찰의 주재소로 행진하여 주재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돌을 던져 투석전을 전개하고, 우편소로 행진하였다. 이희룡(李熙龍)· 이진영(李鎭榮) 등과 함께 도끼로 전신주를 찍어 넘어뜨려 불태우고, 우편소 안으로 들어가 허병규(許丙圭)와 함께 금고를 파손하였다. 이후 평소 주민들로부터 원성이 높았던 일본인 토자토 요테(外里與手)의 상점과 고리대금업자 다카시 히데토모(隆秀知)의 자택 습격에 다른 주민들과 함께 참여하는 등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격렬했던 원곡면과 양성면의 연합 만세시위 소식을 뒤늦게 접한 일제는 4월 3일 조선주차군 제79연대 30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조사,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인정되어 안성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고등법원 검사국에 의해 원곡면과 양성면의 다른 만세시위 참여자들과 함께 고등법원의 관할에 속하는 ‘내란죄’의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고등법원은 1920년 3월 22일 ‘만세운동은 소요죄를 구성할 수는 있어도 내란죄를 구성할 수는 없다’라고 판결하고, 경성지방법원을 관할법원으로 지정하여 돌려보냈다. 이에 대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을 선언함에 따라 실제 재판은 경성복심법원에서 진행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으로부터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 방화로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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