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會烈
會烈1872. 2. 9 ~ 1925. 4. 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둔남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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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72년 2월 9일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둔남면(屯南面) 용정리(龍井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農業)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3일 이기송(李起松), 오병용(吳秉鎔) 등이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獒樹里) 장터에서 일으킨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오수리 장터 만세시위는 오후 2시 무렵 이기송과 김일봉(金一奉) 등이 장터에 나아가 군중 앞에서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에 호응한 마을 주민 800여 명이 시위에 가담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둔남면 일대의 주재소와 둔남면사무소 등으로 행진해갔다. 이때 이영의(李英儀), 이주의(李柱儀) 등과 함께 시위 행렬의 선두에 서서 시위 군중을 이끌고 만세를 높이 외쳤다. 시위가 격화되면서 시위 군중은 시장 부근에 살던 일본인들의 가옥과 상점 등으로 몰려가 돌을 던지며 유리창과 각종 기물을 파손하는 등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시위 도중 이기송을 비롯한 시위 주도자들이 붙잡히자, 이주의, 오병용 등과 함께 2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의 문과 유리창에 돌을 던져 이를 부수는 등 격렬하게 항의하였다. 주재소에 있던 일본인 순사 무라이(村井邑次)와 조선인 순사보(巡査補)인 고택기(高宅基)가 당황하여 시위 군중에게 총을 겨누었다. 동지들과 함께 오히려 고택기에게 달려들어 총을 뺏은 뒤 그를 주재소의 경종대(警鍾臺) 아래로 끌고 나와 구타하여 만세를 부를 것을 강요하고, 이기송과 김영필(金永弼) 등 연행된 동지들을 구출하였다. 그날 저녁에 이르러 시위 군중의 숫자는 2,0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늘어났으나, 남원(南原)에 있던 헌병분대로부터 일제 경찰의 지원 병력이 출동해 무차별 발포와 함께 시위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7월 31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다른 시위 참가자들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다시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역시 같은 해 10월 3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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