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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元杰

元杰

1879. 7. 24 ~ 1935.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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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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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대동(大同)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대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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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2008)

관련 사건

  • · 대동군 반석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8) 1879년 7월 24일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院場里)의 원장시장(院場市場)과 강서군(江西郡) 반석면(班石面) 상사리(上四里)의 사천시장(沙川市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원장리는 평양(平壤)에서 서쪽으로 약 20k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원장시장에서 사천시장까지는 약 10km 거리였다. 두 시장은 비록 소속 군(郡)은 다르지만 면사무소 소재지로서 장날에는 활발히 교류하였다. 반석면 반육리(班六里)에 자리한 반석교회(盤石敎會) 장로 조진탁(曺振鐸)은 1919년 2월 28일에 평양 시내에 갔다가 다음 날인 3월 1일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독립선언식과 시위 행진에 참석하였다. 조진탁은 독립선언서를 챙겨 돌아오던 길에 원장교회에 들려 윤상열(尹相悅)·고지형(高志亨)·차현구(車玄九) 등의 교회 간부들을 만나 평양의 만세시위 소식을 알렸다. 그 자리에서 반석교회와 원장교회가 합동으로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다음 날 차현구는 반석교회 최능현(崔能賢) 장로와 백이옥(白履玉) 영수를 만나 평양의 만세시위 소식을 알리고 원장교회에서 시위를 준비하였다. 최능현은 사천교회 목사인 송현근(宋賢根)에게도 만세시위 준비 사실을 알렸다. 원장교회가 경영하는 합성학교(合成學校) 교감인 임이걸(林利杰)은 평양에 가서 친구인 박인관(朴仁寬)을 만나 평양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독립선언서를 얻어 돌아왔다. 원장교회 간부들은 합성학교에서 시위 준비를 하면서 인근에 있는 산수리교회(山水里敎會)에 연락하여 만세시위에 함께 할 것을 권유하였다. 반석교회에서도 조진탁·최능현·백이옥 등이 시위 준비를 진행하였다. 거사일을 원장시장 장날인 3월 4일로 정하였다. 송현근 목사는 사천교회를 중심으로 사천시장에서 따로 만세시위를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시위 계획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10여 명이 붙잡히자, 일단 조진탁의 집에 몸을 숨겼다. 3월 4일 아침부터 원장교회·반석교회·산수리교회 교인들이 합성학교 운동장에 운집하였다. 오전 10시에 원장교회 간부 주도로 독립선포식이 열렸다. 시위대는 독립선언식을 끝나자 ‘독립만세’를 부르며 원장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합성학교 운동장으로 돌아왔다. 군중이 행진 대열에 합세하면서 시위대가 불어났다. 이날 장날을 맞아 해산물 등을 사러 원장시장에 갔다가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송현근과 최능현은 시위대를 향해 사천시장에서 예정한 시위가 사전에 발각되었음을 알리고 유치장에 갇힌 동지들을 구하는 데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시위대는 오후 1시쯤 사천시장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마을들을 지나갈 때마다 시위 대열에 합류하는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시위대는 수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시위대가 사천시장에 도착할 무렵 헌병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물러서지 않고 돌을 던지며 행진을 계속하였다. 이에 겁에 질린 헌병분견소장 사토(佐藤實太郞)는 분견소 안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계속 총을 쏘았고 나머지 헌병보조원들은 달아났다. 시위대는 분견소에 불을 질러 뛰쳐나오는 사토를 좇아가 죽였다. 헌병보조원 3명도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이날 사천시장에서 총탄에 맞은 사망자는 19명이었고 부상자는 40여 명에 달하였다. 부상자들은 응급처치 후 평양으로 급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시위대는 해산하였지만, 평양 헌병대는 동네마다 샅샅이 뒤져 기독교인으로 교회 간부인 남자들을 중심으로 400여 명을 검거하였다. 검거된 사람들은 평양경찰서와 강서경찰서에서 최조를 받았다. 20여 일의 심문 끝에 대부분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으나 49명이 기소되었으며 그 중의 한 명으로 재판을 받았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 방해죄, 살인 미수죄, 소요죄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1919년 11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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