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潤益
潤益1885. 8. 19 ~ 1970. 1. 1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동군 임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5년 8월 19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금소동(琴韶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진(蔚珍)이다. 1919년 3월 21일 안동군 임하면 금소동과 신덕동(新德洞)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임찬일(林贊逸·林燦逸)·노말수(盧末守)·박유석(朴有石)·임동숙(林東淑)·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석현(林錫鉉)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시위를 이끌었다. 임찬일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직접 겪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청년들을 규합하였다. 이때 임찬일의 제의에 찬동하여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주도자들은 여러 차례 만나 만세운동 계획을 논의하여, 1919년 3월 16일 길안면(吉安面) 장날에 시위를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시위 당일에 참여 인원이 적자, 거사 날짜를 3월 21일로 미루고 금소동으로 장소를 바꾸게 되었다. 만세시위 당일인 3월 21일 집에서 나와 주도자들과 약속했던 장소로 향하였다. 그 곳에는 주도자들 외에도 만세운동에 동참하기 위하여 모인 주민 등 100여 명이 있었다. 오후 6시경 주도자들과 함께 계획한 대로 먼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주도자들의 선창에 모인 군중도 ‘독립만세’를 부르며 호응하였다. 만세운동의 열기가 고조될 즈음 시위대를 이끌고 신덕동으로 향하였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하였다. 저녁 9시경 시위대는 신덕동 경찰관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시위대의 함성에 주재소에 있던 일제 경찰들이 놀라서 밖으로 나왔고,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군중을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총탄을 발포하였다. 사상자가 발생하고 시위대는 흩어지게 되었다. 잠시 흩어졌던 300여 명의 시위대는 사상자 발생에 분노하며 밤 11시경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도자들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로 가서 격렬하게 항거하였다. 임찬일·노말수·박유석 등과 주재소 출입문과 창문 등에 돌을 투척하였고,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 안에 들어가 벽과 기구를 부수고 공문서도 모두 파기하였다. 이어서 시위대는 주재소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이때에는 더 많은 주민들이 참여하여 시위대는 약 500명이었다. 시위대가 면사무소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면서기 김병린(金秉麟)은 뒷산으로 숨고 없었다. 주도자들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돌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문과 벽을 쳐서 건물을 파괴하고,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집기와 문서를 파기하였다.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는 지붕과 기둥만 남고 거의 초토화되었다. 투석전을 끝낸 시위대는 자진하여 해산하였다. 다음 날부터 일제 경찰이 주도자와 참여자에 대한 검거 작전을 펼치면서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7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9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