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春燮
春燮1886. 6. 22 ~ 1956. 4.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동군 임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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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6년 6월 22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금소동(琴韶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진(蔚珍)이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1일 안동군 임하면 금소동과 신덕동(新德洞)에서 펼쳐진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임찬일(林贊逸)·노말수(盧末守)·임범섭(林範燮)·박유석(朴有石)·임동숙(林東淑)·유북실(柳北實)·임석현(林錫鉉)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에 관한 청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 소식을 접하고 임하면에서도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임찬일은 안동군 임하면의 만세시위를 처음으로 계획한 인물로, 고종의 인산(因山)에 참례(參禮)하기 위하여 상경해 직접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하였다. 임찬일에게 서울의 만세시위 상황을 전해 듣고 그의 요청에 동감해 그 자리에서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서 다른 주도자들과 더불어 비밀리에 만나 거사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3월 16일 길안면(吉安面)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하였으나, 당일 예상보다 적은 사람들이 모이자 거사 날짜를 3월 21일로 연기함과 동시에 거사 장소도 금소동으로 바꾸고,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가 위치한 신덕동으로 만세시위를 확대해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21일 약속 장소인 마을 앞에는 주도자들을 포함해 거사 소식을 들은 주민 1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오후 6시경 주도자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위대도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만세시위가 고조되자 시위대를 이끌고 신덕동으로 향하였다. 신덕동으로 행진하면서 시위대와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고, “빼앗긴 우리 강토를 다시 찾자”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의 만세 소리와 구호 소리에 많은 주민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점점 늘어나 300여 명에 이르렀다. 오후 9시경 경찰관주재소에 도착한 시위대는 그곳을 포위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소리에 놀라 주재소 안에 있던 순사들이 뛰어 나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였다. 일제 경찰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시위대는 일시 해산하였고, 임호일(林浩逸)과 신필원(辛必元) 등이 총격에 맞아 사망하였다. 밤 11시경 일제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한 것에 분노한 시위대와 함께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임찬일과 노말수가 선두에 서고 다른 주도자들과 더불어 그 뒤를 따르며 주재소의 출입문과 창문 등에 돌을 던져 건물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일부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벽을 허물고 공문서 등을 파기하였다. 이어서 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로 이동해 돌을 던지고 내부로 들어가 기물과 문서 등을 파괴하였다. 이러한 시위대의 격렬한 저항으로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는 지붕과 기둥만 남은 채 거의 허물어졌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자진하여 해산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22일부터 일제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작전이 시작되었고, 다른 주도자들과 더불어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5월 29일 대구지방법원의 예심을 거쳐, 같은 해 7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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