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學圭
學圭1897. 6. 23 ~ 1974. 7. 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서천군 마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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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7년 6월 23일 충청남도 서천군(舒川郡) 화양면(華陽面) 와초리(瓦草里)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 김인전(金仁全) 목사가 화양면에 설립한 기독교 학교 한영학교(韓英學校)에서 수학하였다. 기독교인이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29일 송기면(宋箕勉)과 함께 서천군 마산면(馬山面) 신장리(新場里) 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마산면의 만세시위는 한영학교 출신의 기독교계 인물들이 주도하였다. 한영학교의 교육을 통해 강한 민족의식을 형성한 송기면은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파악한 후, 마산면에서도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기독교계에서 동지를 규합하였다. 송기면으로부터 만세운동에 대한 제의를 받고,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이근호(李根浩)·송여직(宋汝直)·유성열(劉性烈)·이동홍(李東洪)·노형래(盧亨來)·하중호(河重鎬)·유일동(劉一童) 등과 함께 신장리 장날인 3월 29일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3월 27일까지 각자 자택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시위를 구체적으로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28일에는 송기면 등과 다시 모여 다음날에 거행될 만세시위에 대한 최종 점검을 하고 결의를 다졌다. 3월 29일 오전 11시경 송기면 등과 함께 신장리 장터로 나가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먼저 송기면과 유성렬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많은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여 장터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순사보 이한규(李翰圭) 등 일제 경찰이 즉시 출동해 주도자인 송기면·유성열·송여직 등을 붙잡아 순사주재소로 연행하였다. 이에 이근호·나상준(羅相俊) 등과 시위대를 이끌고 순사주재소로 달려가서 송기면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근호·나상준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주도자들이 계속 붙잡히는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대거 동참하면서 시위대의 규모는 2,0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시위대는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연행된 사람들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나, 일제 경찰은 이를 거부하며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이에 이동홍·고시상(高時相)·양재흥(梁在興)·박재엽(朴在曄)·정일창(鄭日彰)·김인두(金印斗)·이승달(李承達) 등이 “체포 구금된 인사들을 탈출시키기 위하여 출장소를 공격하자”고 외치며 앞장섰다. 시위대는 주재소 창문과 유리창을 부수고 책상과 의자 등 기물을 파손하였다. 이때 송기면·유성열·송여직 등과 함께 구출되어 주재소에서 빠져나왔지만, 이동홍과 양재홍은 일제 경찰의 총격에 맞아 부상당하였다. 송기면 등과 함께 다시 시위대를 지휘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한산(韓山)을 거쳐 서천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중간에 다급하게 서천군수 권익채(權益采)가 시위대로 와서 일제 헌병의 매복으로 많은 희생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며 해산할 것을 간곡하게 요청해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일제 경찰의 조사·색출과정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1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같은 해 5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으로 감형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6월 14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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