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복철
張福喆1890. 12. 6 ~ 1931. 12.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매곡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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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0년 12월 6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매곡면(梅谷面) 노천리(老川里)의 양반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족보에 올라있는 이름은 하철(夏喆)이다. 복철(復哲)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20세를 전후한 시기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이후 노천리에 대한예수교장로회 노천교회(老川敎會)를 설립하였다. 독실한 신앙생활 속에서 교회를 찾는 청년들에게 반일사상(反日思想)이 담긴 설교를 하여 지역의 청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촉발한 만세운동은 현장에서 경험한 지사들에 의해 지방으로 전파되었다. 영동군 매곡면 만세운동은 안광득(安光得)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생각으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동지들의 규합에 노력한 것이다. 만세운동에 대한 안광득의 제안을 받고 안준(安準)·안병문(安秉文)·김용선(金容善)·신상희(申相熙) 등이 안녕(安寧)마을의 비밀회합에서 먼저 동지로 결합하였다. 이들은 안광득으로부터 서울의 독립운동 상황을 듣고, 그가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읽어본 후 만세시위를 결의하였다. 이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문종이에 필사하고 태극기 400여 장을 제작하였다. 만세운동을 위한 비밀모임의 회의에서 동지들과 논의하여 밤나무 묘목장의 주민 동원 작업이 예정된 4월 2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각자의 역할을 분담하여 주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면사무소로부터 묘목 작업에 출석할 것을 통지받은 주민들이 4월 2일 아침 일찍부터 연장을 휴대하고 밤나무 묘목장으로 모였다. 약 1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이자 동지들과 함께 주민들 앞으로 나서면서 시위를 개시하였다. 우선 안광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 뒤를 이어 주민들 앞에 서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현재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연일 계속되고 있음을 연설하며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으며, 시위대 참가자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였다. 이때 안준이 ‘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시위대 전체가 ‘독립만세’를 따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후 안광득·안준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하여 노천리(老川里)의 면사무소 앞으로 행진하였다. 이 자리에서 안병문은 “대한(大韓)의 민족이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독립투쟁의 선상에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연설하여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았다. 이후 면장과 면직원들까지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는 등 만세시위에 참여시키고 만세운동을 이어가다가 오후 5시 무렵 장날이었던 이웃한 황간(黃澗)읍의 장터로 행진하였다. 황간 장터는 장날의 만세시위를 예상한 일제 경찰에 의해 이미 철시되어 있었다. 이에 더 이상의 만세시위를 진행하지 못하고 해산하였다. 하지만 이날의 만세운동 소식은 매곡면 전체로 알려져 다음날인 3일에는 옥전리, 노천리를 비롯한 매곡면의 여러 마을에서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4일에도 오전 11시경부터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시위에 800여 명의 주민이 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고, 기세가 오른 만세시위대는 매곡면장 이하 면사무소의 직원들과 거주 일본인까지 만세시위에 참여시켰다. 매곡면에서 연일 대규모 만세시위가 이어지자, 일제는 추풍령(秋風嶺)의 헌병분견대원을 매곡면으로 급파하여 만세시위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에서 안광득·임진규(林珍圭)·남도학이 일제 헌병에 체포되어 추풍령 헌병분견소로 압송되었다. 이에 연행된 사람들의 구출을 위하여 안준·안병문 등과 함께 남아있는 시위대 150여 명을 지휘하여 추풍령의 헌병분견소로 향했다. 헌병대를 향해 늦은 밤까지 동지들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하였으나, 일제 헌병대는 일체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헌병분견소의 창고에 불을 질러 전소시키는 등 시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시위대는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5일 새벽 5시 경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6일에도 체포된 동지들의 구출을 위해 지역 주민들을 설득하여 30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독립기’를 앞세우고 오전 11시경 추풍령 헌병분견소로 가서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 헌병들은 석방 요구를 묵살하고, 비무장 만세시위대를 향해 총기 발포로 대응하면서 만세시위 참여자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하였다. 이로 인해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다른 주도 인물들과 함께 붙잡혔다. 일제 헌병의 조사 과정에서 매곡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점이 인정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한 결과 같은 해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의 내용 일부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여전히 1심 때와 동일한 징역 1년 3월을 받았다. 이에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도 한동안 교회 운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옥고의 후유증과 일제의 감시로 인해 결국 교회 운영을 포기하고, 문중에서 들인 양자에 의지하여 생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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