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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삼수

張三壽

1897. 3. 3 ~ 1926. 1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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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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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강화(江華)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강화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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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3)

관련 사건

  • · 강화군 부내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3) 1897년 3월 3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길직리(吉稷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생활하였다.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만세운동은 삽시간에 강화도에도 전파되었다. 강화도에서는 길상면 온수리(溫水里)의 유봉진(劉鳳鎭), 선두리의 황도문(黃道文)·황유부(黃有富)·염성오(廉成五)·장윤백(張允伯) 등 감리교계의 기독교 인사들의 주도로 계획되었다. 유봉진 등 주도자들은 3월 1일 이래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파악하고, 이에 찬성하여 강화도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유봉진을 중심으로 3월 11일 황유부의 집에 모여 만세운동의 거사일을 강화장터 장날인 3월 18일로 결정하였다. 이후 이들은 주민들에게 배포할 독립선언서, 「강화 인민에게」, 『국민회보』 등을 인쇄하고, 만세시위에서 주민들과 함께 부를 「독립가」를 만드는 등 구체적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7일 주도자들로부터 만세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같은 기독교도들인 황일남(黃日男)·황윤실(黃允實)·유희철(劉熙哲) 등과 회합하여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이 자리에서 “만세시위 때, 각자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지휘, 선동하자며 결사대원으로 나설 것”을 다짐하였다. 3월 18일, 태극기를 휴대하고, 유희철·황일남·황윤실 등과 함께 읍내 장터로 향했다. 강화읍의 윗 장터, 아랫 장터로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장터에 모인 주민들의 숫자는 무려 10,000여 명의 규모였다. 오후 2시경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시위를 선도하였다. 이것을 신호로 장터에 나온 주민들이 일제히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유봉진의 지휘에 따라 만세시위대는 장터에서 강화향교(江華鄕校)를 거쳐 군청으로 진출하였다. 일제 경찰은 5명의 한인 순사보를 출동시켜 만세시위를 진압하려고 하였다. 한인 순사들은 고압적인 자세로 만세시위의 해산을 명령하며, 시위대의 선두에서 활동하던 유희철과 조기신(趙基信) 등을 체포하여 연행하였다. 곧바로 만세시위대는 격렬히 반발하였다. 만세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이미 군수 이봉종(李鳳鍾)은 순순히 ‘독립만세’를 외쳤고, 만세시위대의 위세에 눌린 일제 경찰은 결국 유희철, 조기신 등 만세시위에 초기에 체포한 주도자들을 석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의 만세시위 이후 외부에서 강화도로 출동한 일제 경찰과 군대의 대대적인 만세시위 참여자 조사, 색출 과정에서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소요죄로 벌금 20원을 받았다. 재판이 종료되기까지 미결수로 감옥에서 9개월 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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