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鼎邦
鼎邦1900. 4. 19 ~ 1992. 11.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혈복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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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900년 4월 19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성호면(城湖面, 현 경기도 오산시) 오산리(烏山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이약한(李約翰)이다. 1919년 혈복단(血復團)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자금과 단원 모집·항일 격문 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3월 중국으로 건너가 중등교육을 이수한 후, 광저우(廣州)에 있는 영남대학(嶺南大學)에 다니면서 중국 참의원(參議員) 부의장 이문치(李文治)와 교류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김창숙(金昌淑)과 한국 천도교·불교 대표 등 3인에게 요청을 받고, 쑨원(孫文)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이문치를 소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쑨원과 중국 참의원·중의원(衆議員)으로부터 각각 독립운동자금을 원조받게 되어, 독립운동자금 조달에 큰 공을 세웠다. 1919년 8월에는 김창숙의 밀사로 국내로 들어와 각지 항일 운동가들에게 밀서를 전달하였다. 같은 해 11월 경에는 서울 종로(鐘路) 김교선(金敎善)의 집에서 김태원(金泰源)과 모의해 안교일(安敎一)·신봉균(申鳳均) 등을 규합하여 소지금 300원으로 혈복단을 조직하였다.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독립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혈복단의 부단장으로 선임된 후, 항일 격문을 배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계획하고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해 12월 26일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20년 1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검사가 항소를 신청하였다. 같은 해 4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미결구류일수 중 50일은 전시 형기에 산입)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1936년 9월에는 다시 중국으로 망명해 유한양행(柳韓洋行) 봉천지점장(奉天支店長)으로 취임하였고, 이후 재만 한인 청년들을 규합해 독립군과 연결시켜 주었고, 후방지원과 정보탐지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광복 이후 농상국 농정과장 대리인과 미군정청 양정과장(糧政課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중국 광둥(廣東) 영사로 임명되었고, 1949년 국공내전 중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상하이(上海)로 가서 위험에 빠진 중국 교포 600여 명의 생명과 재산 옹호, 귀국 알선 등의 임무를 주도하였다. 이후 홍콩 총영사와 주중대사관 총영사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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