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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鍾闊

鍾闊

1877 ~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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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鍾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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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명천(明川)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명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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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의군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하고면(下古面) 황암동(黃岩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22년 당시 45세로, 1877년생으로 추정된다. 만주로 이주한 후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토산자(土山子) 남구(南溝)에 거주하면서 약재상을 하였다. 1920년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에 가입한 후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지린성 옌지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조직된 대한의군부는 대한제국 말기에 활동하던 의병장과 부대원으로 구성된 독립군 단체로 의군단(義軍團) 또는 의군산포대(義軍山砲隊)로 불렸으며, 1919년 이후 공화주의를 표방하였다. 총재 이범윤(李範允), 총사령 김현규(金鉉圭), 참모장 진학신(秦學新) 등이 간부로 임명되었고, 지린성 옌지현·허룽현·왕칭현(汪淸縣)·훈춘현(琿春縣) 등의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지방에 상설기구를 두었으며, 전위대를 통해 군자금 모집에 집중하였다. 이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도 동맹을 체결하고, 군사 활동을 개진하였다. 1920년 (음)3월 5일 의군부 경리 분국장(分局長)인 방정환(方正圜)의 권유로 대한의군부에 입단하였고, 이후 2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토산자·사도구(四道溝) 황직(黃直)·왕칭현 사인반(四人班) 등의 지역에서 밀정 등을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같은 해 (음)3월 10일에는 대한의군부 제1총무 이가감(李假監)의 명령을 받고, (음)3월 15일 사인반과 토산자 지역에서 입단증서를 배부하였다. 그리고 (음)3월경에는 토산자에서 대한의군부 영솔장(領率長) 이춘화(李春化)와 함께 일제 관헌의 밀정으로 의심되는 행상 두 사람을 체포해 본부로 압송하였다. 같은 해 4월 1일에는 최정일(崔精一)과 협의하고, 황직과 남구 백전동(柏田洞)에서 서상덕(徐相德) 등 8명을 밀정 혐의로 처단하였다. 4월 13일에는 대한의군부 분사령관(分司令官) 김소홍(金素鴻)을 따라 50여 명의 단원과 함께 허룽현 이도구(二道溝) 구산시(九山市) 수서촌(水西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해 5월 11일에는 대한의군부 서지방부(西地方部)를 방문하여 중부(中部)의 명에 따라 분국장(分局長)을 역임하였다. 5월 27일 이가감의 명에 따라 독립군 활동을 위한 무기 운반을 위해 임봉호(林鳳鎬)·김창수(金昌秀)·강기현(姜基賢)과 함께 옌지현 국자가(局子街)로 파견되었고, 7월 10일경 같은 용무로 국자가의 동불사(銅佛寺)를 방문하였다. 그러다가 장기섭(張基燮)의 밀고로 일본군 토벌대에 붙잡혀 옌지현 용정촌(龍井村)으로 송치되어 심문을 받았으나 방면되었다. 하지만 이후 이도구 경찰서에 다시 붙잡혀서 청진경찰서(淸津警察署)로 송치되었다. 1921년 11월 10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이른바 살인강도죄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22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5월 1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그해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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