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基盤
基盤1867. 5. 5 ~ 1932. 6.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0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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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0) 1867년 5월 5일 평안남도 용강군(龍岡郡) 양곡면(陽谷面) 정화리(亭花里)에서 태어났다. 일제 판결문에는 본적이 평남 평양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명은 형주(衡柱)이며, 호는 근당(槿堂)이다. 감리교에 입교하여 전도사로 활동하였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평양지부 간부로 활동했다. 대한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독립협회의 활동이 중단되자 중국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다. 1903년 8월 7일 진남포 인력개발회사 관리가 되어 하와이 노동 이민을 주선하였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신민회(新民會) 발기에 참여하였다. 당시 하와이로 이민 온 한국인들은 백인 경영주의 착취로부터 서로를 보호하고자 자치회를 구성하였다. 처음 농장단위로 구성된 자치회는 점차 발전하여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기독교 인사와 유학생의 주도로 신민회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1904년 4월 20일 신민회가 해체되자 5월초 귀국하였다. 배 안에서 손흥조를 만나 재림교의 교리를 듣고 재림교로 개종하고 이름을 기반(基盤)으로 개명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국채보상운동 참여 중에 “나는 식구가 7명이라 1원씩 각각 내어서 2천만 동포 중에 일개인의 의무를 면피하노라”하고 귀가하여 부인에게 본말(本末)을 이야기하였더니, 부인 최신실이 정색하며 “국가적 관념과 천부적 자유는 사람 모두에게 있다. 이 의무는 내가 마땅히 스스로 행한다”라고 말하고 시집올 때 가져온 은장도 1개를 즉시 내놓았다고 한다. 이를 들은 사람들이 흠모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전한다. 이후 감리교도로서 포교 활동에 전념한 결과, 1910년 9월 평양(平壤)·진남포(鎭南浦)·중화(中和)·함종(咸從) 4개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9년 6월경 중국 단둥현(丹東縣)에서 양복상을 운영하면서 이기호(李祁鎬)와 친분을 맺고 독립운동에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독립자금 조달을 위해 지폐위조를 계획하였다. 또 베이징(北京)에서 ‘농사 경영’을 표방하며 조선독립청년단(朝鮮獨立靑年團)을 조직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돕고자 하였다. 그러나 1919년 7월 경북 안동(安東)에서 독립운동 자금 4만 6천원을 모집하려던 계획이 발각되어, 이기호·김사익(金思益)이 붙잡히는 바람에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1932년 6월 5일 자녀들이 유학하고 있던 일본을 방문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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