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鍾國
鍾國1860. 9. 9 ~ 1939. 10. 2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유인석 의병부대(호좌의진)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3)
관련 사건
- · 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3) 1860년 9월 9일 충청북도 제천군(堤川郡) 봉양면(鳳陽面) 구곡리(九曲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규수(李圭壽)이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응천(應天), 호는 석포(石浦)이다. 이명은 이종대(李鍾大)·이종응(李鍾應)이다. 박세화(朴世和)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1896년 유인석(柳麟錫) 의병부대의 운량관(運糧官)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고,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를 지원하였다. 1895년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조선 정부에서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실시하자, 최익현(崔益鉉)은 “내 목은 자를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며 강하게 저항하였다. 1895년 10월 10일 서울에 창의소 고시문이 나붙었고, 각지에서 유생들을 중심으로 거의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 동지들과 함께 유인석을 만나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결의하였다. 1896년 1월 유인석은 호좌의진(湖左義陣)을 결성하고, 중군장에 이춘영(李春永), 전군장에 안승우(安承禹), 후군장에 신지수(申芝秀), 선봉장에 김백선(金伯善)을 임명하는 등 편제를 갖추었다. 이때 운량관으로 임명되어, 군량의 조달과 운반·보급의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러한 지원과 협조에 힘입어 호좌의진은 같은 해 2월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유인석은 이후 점령한 각지에 휘하를 보내 길목을 차단하여 일본군으로부터 방어하도록 하고, 친일 관리를 처단하며 추가적으로 의병을 모으는 데 주력하였다. 또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이라는 격문을 띄워 관리들의 결단을 촉구하고, 의병에 협력할 것을 호소하였다. 유인석 의병부대는 내륙 교통의 요충지인 충주성을 근거지로 삼았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으로 결국 청풍(淸風)과 단양(丹陽) 방면으로 패주하였다가 제천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처럼 사기가 떨어졌을 때 이인영(李麟榮)이 원주(原州)에서 의병을 모아 왔으며, 이강년도 문경(聞慶)에서 거의하여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이강년은 유인석과 사제관계를 맺고 호좌의진의 유격장에 임명되어 수안보(水安堡)·단양·음성(陰城)·문경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강년이 그해 5월 청풍 탄지동(炭枝洞, 현 제천시 한수면 탄지리) 전투에서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에게 패하고 제천군 덕산면(德山面) 성암리(城岩里)로 피신해오자 은신처를 제공하였다. 또 이강년을 도와 남은 의병을 수습하고 의병부대를 다시 규합하도록 지원하였다. 이때 이강년은 그의 집에서 15일 이상 머무르면서 지원을 받아, 대미산(大美山)에 흩어져 있던 300여 명의 의병을 거두어 의병부대를 재건하였다. 한편, 충주관찰사 이승우(李勝宇)와 제천군수 조두환(曺斗煥)의 추천으로 덕산면장 발령을 받았지만 거절하였다. 제천군 봉양면에 은거하면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사망하거나 일제 경찰에 잡혀간 이들의 가족을 돌봐주다가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만년에는 서당에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