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華鎭
華鎭1885. 10. 3 ~ 1940. 6.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5)
관련 사건
- · 중기의병(신돌석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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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5) 1885년 10월 3일 경상북도 영양군(英陽郡) 수비면(首比面) 수하동(水下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 이명은 이춘경(李春慶)이다. 1906년 4월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에서 교련장(敎鍊將)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신돌석은 1906년 4월 6일 경북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도곡동(陶谷洞) 복평촌(福坪村)에서 영해(寧海) 의병부대를 일으켰다. 이때 가담하여 교련장에 임명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9월부터 일제의 ‘귀순 장려책’으로 귀순 투항자가 늘어나면서 신돌석 의병부대는 크게 위축되어 가고 있었다. 실제로 병력은 줄고 군수품 보급도 안 되는 상태에서 혹한과 토벌대 세력의 강화까지 더해져 의병 희생자만 늘게 되었으니 의병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신돌석은 의병부대 해산을 명하고 투항을 권고하였다. 이에 1908년 10월 25일 이오촌(李梧村)과 함께 평해군에 투항하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1908년 10월 25일 영양 수비면 동두동(東頭洞)에 주소를 둔 신돌석의 부하 이오촌(38세)·이화진(33세) 두 사람이 귀순을 신청하였기에 ‘면죄문빙(免罪文憑)’을 내어 주었다”라고 한다. 갑자기 투항한 데에는 신돌석 의병장의 해산 명령과 투항 권고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영해 의병부대에서 활동하다가 신돌석이 사망한 뒤, 영양의병 김대규(金大圭) 의병부대에 들어가 활동했다는 설이 있다. 귀순 후에도 항일 활동을 계속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 이후 전국 각지를 돌며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1935년 만주로 망명하여 한인 동포들을 위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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