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京祚
京祚1879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김영백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3)
관련 사건
- · 후기의병(김영백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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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3)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좌산내면(左山內面, 현 부안군 변산면(邊山面)) 대소리(大所里, 또는 大巢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09년 당시 31세로, 1879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임경조(林京朝)를 사용하였다. 1908년 10월부터 12월까지 의병장 김영백(金永伯)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참여한 후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6월 헤이그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이후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강탈하는 내용의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더욱이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강행되면서 해산 군인들까지 의병에 참여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1907년 10월 전라남도 장성(長城)을 거점으로 활동을 시작한 김영백 의병부대는 이후 전남 광주(光州)와 장성에서 활동하다가 범위를 넓혀, 전북 부안·정읍(井邑)·고부(古阜)·고창(高敞)·흥덕(興德) 일대까지 진출하며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1908년 4월 김영백 의병부대는 전북 정읍과 흥덕 등지에서 본격적인 전투를 치루면서 근거지를 옮겼고, 정읍의 단곡리(丹谷里)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의 기병을 기습 공격하였다. 이어서 같은 해 7월 흥덕 소속 수비대 보병과 격전을 벌였다. 또한 그해 9월 21일에는 흥덕의 방장산(方丈山)에 위치한 백계동(白溪洞)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맞서 싸웠다. 이때 김영백 의병부대는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전북 부안 일대에서 병력을 강화하고, 군수물자를 징발하는 등 부안을 주둔지로 삼았다. 실제 부안 출신 의병인 김보배(金寶拜)는 같은 해 9월 3일 김영백의 지휘 하에 의병 70명과 함께 부안군 입상면(立上面) 수리(藪里)·반평리(半平里)에서 각각 엽전 100냥을 군자금으로 모집하기도 하였다. 1908년 10월 4일 김영백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이후 의병부대와 함께 이동하면서 일본군 수비대 등과 교전하였고, 군자금 모집 활동도 전개하였다. 특히, 그해 10월 상순에는 의병부대와 함께 장성의 신기리(新基里)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11월 상순에는 장성의 오현(鰲縣)에서 벌어진 헌병대와의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12월 3일까지 전북 흥덕·정읍 일대와 전남 장성 일대의 촌락을 돌아다니면서 40여 명의 부대원과 함께 군자금과 군수물자를 징발하여 의병부대의 전열을 재정비하도록 도왔다. 하지만 근거지인 장성 일대에서 공격을 받은 김영백 의병부대가 전북 흥덕·부안·고부·고창 일대로 쫓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부대원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후 인근 해안가에 몸을 숨기고 지냈다. 호남 지역의 의병 활동이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인해 소멸 단계에 이르자, 일제는 피신해 은거하고 있던 소수의 의병까지 체포하기 위해 수색활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11월 20일 목포경비소장 무카이(向井) 경부(警部)의 명령으로 경비선을 타고 온 순사들에게 수색을 당하였고, 같은 해 11월 24일 김여삼(金汝三)·박재두(朴在斗)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09년 12월 1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폭동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옥고를 겪다가, 1910년 칙령 제325호 대사령에 의거해 사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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