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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의식

林義植

1899. 7. 19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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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임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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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덕원(德源)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덕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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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8)

관련 사건

  • · 함흥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8) 1899년 7월 19일 함경남도 덕원군(德源郡) 풍하면(豊下面) 법동리(法洞里)에서 태어났다. 함흥농업학교(咸興農業學校)로 진학하여 1919년 당시 2학년에 재학 중으로, 함흥군(咸興郡)에 거주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함흥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함흥 지역의 초기 만세운동은 기독교계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평양(平壤)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의 교사 강봉우(姜鳳羽)는 2월 26일 신창리(新昌里) 교회에서 함흥 지역의 기독교 목사와 장로 등을 모아 놓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 정세의 동향과 한국의 처지 등을 강연하였다. 이때 중하리(中荷里) 교회로부터 원산(元山)에서 3월 1일 한국의 독립을 위해 거사할 예정이니 함께 궐기하자는 연락이 왔다. 함흥 기독교 관계자들은 의논 끝에 만세운동의 거사일을 장날인 3월 3일로 결정였다. 이 시기 함흥 지역의 학생들도 함흥고등보통학교, 함흥농업학교, 영생중학교(永生中學校)의 3~4학년 학생으로 구성된 함산학우회(咸山學友會)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2월 28일 함산학우회의 주요 인물인 한태연(韓泰然) 등은 보성전문학교 학생대표 강기덕(康基德)이 곽선죽(郭善竹)을 통하여 보낸 독립선언서를 받고 만세시위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기 시작하였다. 한태연 등은 3월 1일 간부회의에서 3월 3일 새벽 4시 30분 서함흥역(西咸興驛) 앞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3월 1일 곽선죽·박희성(朴希聖)·이영화(李榮華)의 연락으로 박세근(朴世根) 집에서 열린 함흥농업학교 학생들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곽선죽 등으로부터 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을 전달받았다. 강흥락(姜興洛) 등 다른 학우들과 함께 만세운동의 취지에 동의하였다. 이후 함흥농업학교의 기숙사로 돌아와 강흥락 등과 함께 다른 학생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한편 3월 2일 이 계획과는 무관하게 이미 군중이 산발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 경찰은 시위대 300여 명을 체포하였고, 3월 3일 새벽 함흥 전 시내에서 대규모의 예비검속을 실시하였다. 이 검속으로 기독계의 지도자와 함산학우회 간부들이 모두 붙잡혔다. 3월 3일 오후 서문거리 모퉁이집의 지붕 위에서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선창되자, 순식간에 영생중학교, 함흥농업학교, 함흥고등보통학교, 영생여학교 학생과 시민 1,000여 명이 모여들어 시위 대열을 형성하였다. 여기에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함흥 시내 곳곳을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대규모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는 경찰과 헌병대,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시위대를 향해 총칼과 갈고리를 휘둘러 많은 부상자를 발생시키면서 폭력적으로 시위를 진압하였다. 이때 강흥락 등과 함께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그해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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