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周鵬
周鵬1880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1919년 철원군 내문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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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0) 자료의 한계로 정확한 출생시기는 알 수 없다. 강원도 철원군(鐵原郡) 내문면(乃文面) 독검리(篤儉里) 출신이다. 다만,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40세이므로 1880년생으로 추정된다. 천도교인(天道敎人)이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8일 내문면 독검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철원군은 강원도 내에서도 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이다. 3월 2일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고, 3월 10일에는 학생과 기독교 측이 함께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그리고 3월 11일과 8일, 4월 5일에도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한편 내문면 독검리는 묘장면(畝長面) 산명리(山明里)와 함께 철원군 천도교의 중심지로, 철원군에서의 선언서 배포를 지휘했던 교훈(敎訓) 최병훈(崔炳勳)도 이 마을 출신이었다. 4월 7일 저녁 손병희(孫秉熙)의 독립정신과 철원군의 만세운동 열기를 이어받아 같은 마을에 사는 천도교인 최재명(崔在明)·최재청(崔在淸) 형제, 박용득(朴龍得)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다음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리고 구장(區長) 윤선삼(尹先三)에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는 취지의 통문을 만들어 배포하도록 하였다. 또한 인근 오동리(梧桐里)의 천도교인 윤상만(尹相萬)과 마방리(馬放里)의 이홍달(李鴻達) 등을 포함하여 주변 마을에 통문을 보내 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며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때 같은 마을의 이명여(李明汝)가 주민들을 모으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윤태병(尹泰炳)·강기준(姜祺俊) 등은 뒤늦게 통문을 받고 합류하여 8일 새벽부터 마을을 돌며 주민들을 모았다. 4월 8일 주도자들과 선두에서 독검리 주민들을 이끌고 면사무소가 있는 마방리로 이동하였고, 오동리에서 윤상만이 규합한 마을 주민들이 합류하였다. 이후 반석리(盤石里)를 지나 내문리(乃文里)와 마방리에 이르러 주민들이 시위대에 합세하였다. 오후 1시경 내문면사무소로 이르렀을 때 시위대의 규모는 7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를 에워싸고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면사무소 앞에 태극기를 높이 걸고, 만세시위에 면장이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면장 허씨가 이미 달아났기 때문에 서기(書記) 최병건(崔炳健)이 대신 나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이러한 만세시위 소식을 접한 석교리(石橋里) 헌병주재소 헌병들이 급파되어 시위대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리고 일제 헌병들은 만세시위를 멈추지 않는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해 이들을 해산시켰다. 이후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6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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