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周庠
周庠1867. 10. 11 ~ 1948. 5.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국민회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1919년 광주군 광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6) 1867년 10월 11일 전라남도 광주군(光州郡) 본촌면(本村面) 일곡리(日谷里, 현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이주상(李周祥)을 사용하였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0일 광주군 광주면(光州面)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아들 이윤호(李允鎬)·이창호(李昌鎬)와 함께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같은 해 가을에는 국민회(國民會)에 가입하고, 회원 모집과 독립운동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광주 읍내의 만세운동은 일본에서 유학하다 2·8독립선언을 보고 귀향한 정광호(鄭光好)와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도(目睹)하고 돌아온 기독교 목사 김철(金鐵)을 중심으로, 숭일학교(崇一學校) 교사 최병준(崔丙浚)과 수피아여학교(須皮亞女學校) 교사 박애순(朴愛順) 등이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들은 각자 역할을 나누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고, 학생·기독교인·주민 등을 동원하는 방침을 세웠다. 이때 거사 계획을 접한 후, 일곡리 일대 주민들을 모아 만세시위 참여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3월 10일 오후 2시 30분 광주면의 작은 장날을 이용해 부동교(不動橋) 아래에 수 백 명이 모였고,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태극기·독립가 등이 배부되었다. 이어서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양림동(楊林洞)·북문(北門)·지산면(芝山面) 방면에서도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내로 행진해 합류하였다. 이때 지산면 방면에서 일곡리·생용리(生龍里) 등지에서 모인 사람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이동하였다. 중간에 읍내에서 출발한 사람들과 합류하여 우체국 앞으로 행진하였다. 오후 5시경 일제 기마헌병대와 재향군인회 소속 퇴진 군인들이 시위대를 습격하여 강제로 해산시키면서 약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때 두 아들과 함께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고,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다. 1919년 6월 숭일학교 교사 유한선(劉漢先)은 장공섭(張公燮)이 평양에서 보내온 문서를 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원조할 목적으로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허원삼(許元三)·최종렬(崔鍾烈)·김양숙(金良淑) 등과 함께 유한선의 권유를 받고 국민회에 가입한 후, 같은 해 (음)7월 경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일곡면 일대에서 회원 8명을 모집하여 8원의 회비를 모은 후, 스스로 3원을 보태 11원을 유한선에게 교부하였다. 1919년 10월에는 스스로 모은 16원과 유한선이 모은 14원 등 총 30원을 평양 기독교총회 일정에 맞추어 직접 가지고 가서, 숭실대학 운동장에서 장공섭에게 전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일제 헌병에게 발각되어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혐의로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20년 4월 1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검사 측에서 항소하였다. 같은 해 6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0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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