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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利杰

杰

1898. 11. 29 ~ 1961.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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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林利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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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대동(大同)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대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조선국민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80)

관련 사건

  • · 1919년 강서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80) 1898년 11월 29일 평안남도 대동군(大同郡) 금제면(金祭面) 원장리(院場里)에서 태어났다.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평양에서 조직된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동창면(東倉面)에 있는 배영학교(培英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만주 랴오닝성(遼寧省)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양기탁(梁起鐸)을 만나 논의한 끝에 국내에서 활동하기로 하고 고향인 원장리으로 돌아와 사립 합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4일 모락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평남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와 강서군(江西郡) 반석면(班石面) 상사리(上四里) 사이에는 5일장인 모락장이 섰다. 두 지역은 각각 대동군과 강서군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장날에는 서로 왕래가 잦았다. 장로교 소속 교회로 원장리의 원장교회(院場敎會), 산수리(山水里)의 산수리교회(山水里敎會), 상사리의 반석교회(盤石敎會), 반석면 반육리(班六里)의 사천교회(沙川敎會) 등 네 곳은 서로 인접하여 활발히 교류하였다. 네 곳의 교회가 연합하여 1919년 3월 4일에 일으킨 모락장 만세시위는 수원 제암리 투쟁과 함께 만세운동의 대표적인 유혈 참극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시위 계획은 반석교회 장로이며 사립 반석학교를 설립·운영하던 조진탁(曺振鐸) 장로가 3월 1일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거행된 독립선포식과 거리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몇 장의 독립선언서를 얻어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조진탁은 귀가길에 원장교회에 들려 장로인 윤상열(尹相悅)·고지형(高志亨)·차현구(車玄九)를 만나 평양에서 있었던 독립선포식과 만세시위를 설명하고 원장교회와 반석교회는 물론 산수교회와 사천교회까지 연합하여 원장 장날인 3월 4일에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 소식을 고지형·윤상열·차현구에게 듣고 평양으로 가서 친구 박인관(朴仁寬)을 만났다. 박인관은 대동군 용산면(龍山面) 출신으로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숭덕학교 교사를 지내며 3월 1일 만세시위를 준비한 인물이었다. 박인관에게 평양 사정을 듣고 독립선언서 몇 장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 합성학교에서 밤을 새우며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시위 준비에 몰두하였다. 한편 차현구 장로는 반석교회 최능현(崔能賢) 장로와 백이옥(白履玉) 영수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최능현은 사천교회 송현근(宋賢根) 목사에게도 거사 계획을 알렸다. 송현근 목사는 김해진(金海鎭)의 집에 교회 간부를 소집하여 모락장에서의 별도의 시위를 준비하였다. 그런데 헌병보조원에게 발각되어 김해진을 비롯한 10여 명이 검거되었다. 송현근은 조진탁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3월 4일 10시 원장리 합성학교 운동장에서는 1,000여 명이 모여 독립선포식을 거행하였다. 원장교회 차병규(車炳奎) 장로의 기도로 시작하여 지석용 장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때 직접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포식을 가져야 하는 필요성에 대해 40분간 연설하고 평화적 시위를 벌일 것을 당부하였다. 시위 군중은 대형 태극기를 높이 들어 앞세우고 나팔수를 선두로 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원장 시장을 향해 행진하였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다시 합성학교 교정으로 돌아올 때는 군중이 뒤따랐다. 이때 최능현과 송현근이 모락장 시위는 사전에 발각되어 계획이 좌절되었음을 알리고 헌병대 유치장에 갇힌 동지들을 구하자고 호소하였다. 시위 군중을 이끌고 대형 태극기를 앞세워 헌병대가 있는 모락장으로 향하였다. 모락장에 거의 도착하여 언덕길을 넘으려 하자, 사천 헌병분견소장과 헌병보조원들이 발포하였다.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격분한 시위대는 돌을 던지고 맨주먹으로 저항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분노한 시위대는 헌병분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분견소장과 헌병보조원들을 처단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유치장에 갇혀 있던 동지들을 구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일제 헌병대가 출동하여 만세시위 참가자 4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이 과정에서 체포를 피해 만주 류허현 삼원보로 잠시 몸을 피해 6개월을 머물렀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하이로 건너갈 목적으로 안둥(安東)에 갔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붙잡혀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1919년 11월 4일 평양 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살인죄, 방화죄, 소요죄로 징역 15년을 받았다. 이에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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