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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신

全昌信

1900. 1. 24 ~ 1985.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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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전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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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성진(城津)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성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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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함흥군 함흥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900년 1월 24일 함경북도 성진군(城津郡) 학성면(鶴城面) 용대리(龍大里)에서 부친 전원규와 모친 안경혜의 맏딸로 태어났다. 1908년 함북 성진(城津)으로 이사하여 기독교에 입문하고, 캐나다장로회가 세운 성진 보신여학교 보통과에 입학하였다. 회고록 『작은 불꽃』에 따르면, 1912년경 12세에서 16세에 걸친 보신여학교 학생들 8명과 함께 9송(九松)결사대를 조직하고, 장차 북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가담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국권회복에 목숨을 바칠 것을 굳게 약속하며 신체단련을 위한 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캐나다 선교부에서 중심구역을 성진에서 함흥(咸興)으로 이전하자 1916년 9월에 성진 보신여학교에서 함흥 영생여학교(永生女學校)로 학적을 옮겨 1917년 영생여학교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영생여학교는 교원을 양성하기 위하여 사범과 설치 허가를 신청하였으나 거부당하자 대신 보습과(補習科)를 설치하여 5명의 졸업생을 진학시켰다. 1918년에 보습과를 졸업하고 영생여학교 보통과 교사에 특채되었다. 영생여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이근재(李根載)·한영호(韓泳鎬)·최명학(崔明鶴)·김기섭(金基燮) 등과 함께 1919년 3월 3일 함흥군 함흥면 함흥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3일 수백명의 군중과 함께 함흥면 대화정(大和町)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피신하였다가, 3월 18일 오후 원산역(元山驛) 부근에서 일제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붙잡혔다. 함흥경찰서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고,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그해 12월까지 옥고를 겪고 풀려났다. 1920년 4월 도쿄(東京) 동양영화(東洋英和)고등여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인이 설립한 영화여학교는 교사진이 주로 캐나다장로회에서 파견된 선교사들로, 오전에는 일본어를, 오후에는 영어를 주로 가르쳤다. 고등학생에게는 영어는 물론 서구문화와 피아노, 바이올린 등도 가르쳤다. 영어 실력이 부족하여 고등과 4학년으로 등록하게 되었다. 영어, 음악, 미술은 부족하나 물리, 화학, 수학, 문법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921년 8월 여름방학을 이용해 귀국해 성진여자청년회 주최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였으며, 1922년 교사 자격증을 받고 귀국하였다. 하지만 1919년 만세운동 참가에 따른 수감생활로 정식 교원이 될 수 없었다. 영생보통학교 교장의 재량으로 정식인가 없는 직원으로 이후 10여 년간 교원생활을 하게 되었다. 1924년 4월 1일 함흥 영생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함경남도 정평(定平) 출신의 김기섭(金基燮, 이명 김주(金鑄))과 결혼하였다. 김기섭은 1919년 3월 함흥 만세시위를 함께 주도하고 재판을 받은 인물이다. 결혼 후에도 교원생활과 사회활동을 계속하였다. 1926년 1월 18일 함흥여자청년회가 주최한 여류(女流) 대강연회에서 ‘가족주의’란 주제로 강연을 하였고, 1928년 5월 13일 근우회(槿友會) 함흥지회 설립대회에서는 집행위원 18명 중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4월 1일 제3회 정기대회에서는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함흥지역을 대표하는 여성 지도자였다. 1930년대에는 함남지방 여전도회에서 일하였다. 1930년 함흥중앙교회에서 함남지방 여전도회 제1차 연합회를 개최하여 회장을 선출하고, 회칙을 제정하였다. 이때 회계의 임무를 맡아 이후 10년 가까이 수행하였다. 1938년에는 학교를 그만두고, 함남지방 여전도회 순회 총무직을 맡았다. 각 지회 발전을 위하여 남쪽으로 안변(安邊)에서 북쪽으로 북청(北靑)까지 100여 개의 지회를 돌아다니며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리신 우리 민족을 찾고 계신다”라는 강연을 하였다. 하지만 함남지방 여전도회 연합회는 1939년에 해산 당하였다. 광복 후인 1945년 12월 12일 함흥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한국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간사의 직책을 맡았다. 1946년 5월 15일 미군정에서 여자경찰관을 모집할 때 양한나(梁漢拿) 등과 함께 간부 후보생으로 지원하였다. 간부 15명과 여경 1기생 64명은 2개월간의 훈련을 이수하고, 7월에 전원 서울에 배치되었다. 1947년 2월 17일 수도관구 경찰청에 여자경찰서가 창설될 때 보안주임으로 발령받았다. 1950년 11월 인천여자경찰서장 서리로 임명되었다. 1952년 경찰을 그만두고, 1953년부터 7~8년간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였다. 1981년 4월부터 2년간 3·1여성동지회 제8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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