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明禹
朱明禹1860. 8. 5 ~ 1921. 1. 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강계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60년 8월 5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곡하면(曲河面) 오천동(奧川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운당(雲堂)이며, 이명은 주관길(朱寬吉)이다. 1910년 동지 24명과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사를 같이하기로 혈서(血書)로 맹세하고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와 연락하며 적극 협력하였다. 1919년 4월 8일 강계군 강계면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평안북도 동북 지역의 중심지였던 강계군의 첫 만세시위는 3월 3일 입관면(立館面)에서 천도교인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며 독립선언서를 살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3월 5일에는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태극기를 들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강계면 읍내에서는 3월 20일경부터 영실학교(英實學校) 교사 김경하(金京河), 명신학교(明新學校) 교사 정준(鄭儁), 회계 담당인 한봉민(韓奉珉) 등이 만세시위 준비를 시작하였다. 김경하 등은 다른 지역 만세운동과 마찬가지로 강계면 읍내에서도 기독교와 천도교의 제휴를 통해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기독교측 8명, 천도교측 3명, 지역유지 4명 등을 비롯한 20여 명은 3월 25일 광신여학교(光新女學校)에 모여 ‘이 거사에서 책임지고 희생할 것을 각오한다’는 의미를 담은 연판장을 작성하고 서명·날인하였다. 4월 1일 오전 11시 남장대(南將臺)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주도자 중 하나인 정준이 4월 1일 만세시위에 참여할 수 없는 사정이 생기면서, 거사일을 4월 8일로 변경하였다. 김경하는 영실학교 학생 김성길(金成吉)·문태선(文泰善)·강석문(姜錫汶)·김명하(金明河)·김형준(金瀅濬) 등과 함께 동생 김성하(金成河)의 안방에 모여 태극기 2,000여 장을 만들었다. 또한 학생들이 태극기 깃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싸리나무대를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오자, 기꺼이 이를 내어 주었다. 학생들은 이것을 강계면 읍내 북문 밖에 숨겨 놓고 나누어 김성하의 집으로 옮겼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인 송기숙(宋紀叔)에게 받아 김창욱(金昌郁) 전도사가 계례지병원(桂禮智病院) 지하실에 설치된 등사판을 이용해 병원 직원들의 협조를 받으며 2,000여 장을 인쇄하였다. 4월 8일 11시 남장대교회의 종이 울리자 학생들이 집집마다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돌렸다. 장날이라 장터에 나온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시위대는 순식간에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장봉준(張奉俊)이 대형 태극기 2개를 들고 서 있던 자래바우든덕으로 모여들었고, 명운행(明雲行)의 선창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2개의 대형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현수막를 앞세우고 군청과 헌병분견소가 있는 북문을 향해 행진하였다. 읍내 중심가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던 시위대가 북문에 도착하자, 일제 기마헌병들과 북문 성루 위에 대기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가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날 일제 군경이 쏜 총역에 맞아 주도자인 정준과 임신 8개월이던 한씨(韓氏) 부인 등 4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일제 군경은 이날 체포된 명운행이 갖고 있던 연판장에 서명한 주도자들을 일제히 검거하였다. 다행히 이때 붙잡히지 않고, 독립당주비단(獨立黨籌備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선임된 뒤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활동을 지속하다가 1920년 9월 6일 강계군 곡하면장 전원찬(田園燦)과 함께 붙잡혀 압송되었다. 이후 신의주감옥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다가 1921년 1월 2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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