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凡述
崔凡述1904. 5. 26 ~ 1979. 7.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사천 3.1운동
- · 일본 대역사건
- · 만당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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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4년 (음)5월 26일 경상남도 사천군(泗川郡) 서포면(西浦面) 율포리(栗浦里)에서 최종호(崔鐘鎬)와 광산 김씨(光山 金氏)의 4남 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본명은 최영환(崔英煥), 법호는 금봉(錦峯), 자호는 효당(曉堂)이다. 1909년 5월 까치섬에서 서당을 다니며 공부하였고, 1910년 4월 사립개진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일어교사를 배척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당하였다. 1915년 3월 곤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마을 구조산재(九鳥山齋)에서 당숙 최남준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배웠다. 1916년 (음)1월 12일 다솔사(多率寺)에 입산해 불교에 귀의하였고, 그해 4월 해인사(海印寺) 지방학림에 입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울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조카 최원형(崔垣亨)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수령하여 해인사 동학들과 함께 10,000장을 복사한 뒤 경남 서부 일대 책임을 맡아 배포하였다. 그해 3월 30일 개진학교 동기 8명과 태극기를 준비하고 곤양면(昆陽面) 장날을 택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려고 하였으나 일제 헌병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이후 만 15세 미만이라는 이유로 풀려났다. 1922년 6월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알고자 일본 도쿄(東京)에 건너갔다가 그해 8월 박열(朴烈)을 만나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하였다. 1923년 4월 도쿄 릿쇼(立正)중학교 3학년에 편입해 다니면서 6월 박열·육홍균(陸洪均) 등과 불령선인사(不逞鮮人社)를 조직하고 『불령선인』 주보를 발간하였다. 일왕 암살을 목적으로 박열과 논의하고 중국 상하이(上海)에 가서 다물단(多勿團) 동지로부터 폭탄이 든 상자를 도쿄로 운반하였다. 같은 해 10월 5일 동지들 간 불화로 거사계획이 탄로나 이른바 대역사건(大逆事件)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28년 7월 다솔사 주지로 임명되었다. 1930년 5월 불교계 비밀결사 만당(卍黨)이 결성될 때 박영희(朴暎熙)로부터 취지를 전해 듣고 가입하였고, 1931년 초 김법린(金法麟)과 만당 도쿄지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귀국하였고, 그해 4월 중순 일제에 발각되는 것을 차단하고 당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표면상 만당의 자진 해체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수시검속으로 1934년 5월 9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며,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8년 10월 2일 만당 조직이 탄로나 고초를 겪었다. 1940년부터 1942년 1월까지 한용운(韓龍雲)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몇 차례에 걸쳐 전달하였다. 1942년 3월 신채호(申采浩) 관련 자료 수집에 착수하였고, 그해 7월 김법린 등과 해인사·다솔사에서 한글로 강의하고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41년 5월 일제의 예비검속법 제정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었다. 1942년 10월 무렵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비밀리에 숨긴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에 대해 심문을 받았고, 사상범으로 옥고를 겪던 중 1944년 풀려났다. 광복 후 계간지 『신생』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복간본을 4회 연재하였다. 1947년 2월 미소공동위원회 대한불교단체 대표,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다. 그해 7월 신익희(申翼熙)와 국민대학을 세웠고, 이후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 제1대 총선에서 경남 사천에서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73년 6월 백야김좌진장군·만해한용운선생기념사업회 고문으로 위촉되었으며, 그해 만해한용운전집간행위원회를 주도하여 『한용운전집』을 간행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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