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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定烈

定

1900. 6. 24 ~ 1962.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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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李定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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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唐津)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당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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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민국임시정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서울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900년 6월 24일 충청남도 당진군(唐津郡) 송산면(松山面) 도문리(道門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만위(晩瑋)이며, 호는 춘호(春湖)·한정(漢汀)·법명(法明)이다. 이명으로 윤봉조(尹鳳朝)·이방(李芳) 등을 사용하였다. 부친은 종사랑(從仕郎) 중추의관(中樞議官)을 지낸 이종백(李種百)이며 모친은 파평(坡平) 윤씨(尹氏)이다.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인 해주(海州) 오씨(吳氏) 밑에서 자라면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이후 이종현(李種現)의 양자로 입양되었으며, 경성전수학교(京城專修學校)를 졸업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천석꾼으로 통하는 집안의 재산을 수차례에 걸쳐 모두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하였다. 1918년에는 북간도의 롱징촌(龍井村)에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희사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종로경찰서에 한때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1920년 1월 주식회사 동아일보사를 설립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발기인주주를 모집할 때 참여하였다. 1919년부터 192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농지를 매각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현금과 200석 정도를 추수할 수 있는 농지를 매각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모집원인 강태동(姜泰東)을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1921년 5월에도 270석 정도를 추수할 수 있는 농지를 다시 매각하여, 그해 6월 임경호(林京鎬) 등과 함께 직접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이회영(李會榮)을 만나 독립운동자금으로 기탁하였다. 약 1년 정도 중국에 머무르면서 조성환(曺成煥)·김좌진(金佐鎭)·이세영(李世永)·김원봉(金元鳳)·유석현(劉錫鉉)·유근(柳瑾) 등 10여 명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의 조달 등 운동방략에 대해 협의하였다. 그 결과 이회영 등으로부터 국내의 자금을 조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1922년 4월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직후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곧바로 150석을 추수할 수 있는 농지를 매각하여, 강태동을 통해 임시정부에 헌납하였다. 1924년 가을에는 230석을 추수할 수 있는 농지를, 1925년 350석을 추수할 수 있는 농지를 차례로 매각하여, 민효식(閔孝植) 등과 함께 다시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이시영(李始榮)에게 전달하였다. 이때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김창숙(金昌淑)·신익희(申翼熙) 등과 군자금 조달 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1929년에는 210석 정도를 추수할 수 있는 마지막 농지 전체를 처분하여 이시영에게 군자금으로 전달하였다. 이시영과 협의하여 1932년 이래 서울 옥인동(玉仁洞)에 주소지를 두고, 충청북도 영동(永同)·충주(忠州), 평안북도 구성(龜城)·삭주(朔州)·자성(慈城)·태천(泰川), 황해도 곡산(谷山), 강원도 평강(平康) 등지에서 광산을 경영하였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매월 중국으로 송금하여 독립운동자금으로 조달하였으며, 광산은 국내외 동지들의 비밀연락과 회합 장소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 관보』를 통해 정식으로 광업권을 설정하고, 대표가 되어 광산을 경영하였다. 1937년 5월 29일에는 서병철(徐丙轍)과 함께 영동군 황간면(黃澗面)과 매곡면(梅谷面) 일대에 광업권을 설정하여, 같은 해 6월 25일 공동광업대표자로 등록하였다. 1938년 5월 20일에는 구성군 천마면(天摩面)과 삭주군 외남면(外南面) 일대의 금은광(金銀鑛)에 광업권을 설정하였고, 1942년 공매(公賣)할 때까지 대표자로 있었다. 1938년 8월부터 1941년 7월까지 구성군 천마면 안창동(安倉洞) 은창산(銀倉山) 국유임야(國有林野)를 광업용지로 대부(貸付) 허가를 받았다. 같은 해 9월 30일에는 박해철(朴海哲)과 함께 충주군 앙성면(仰城面) 일대에 광업권을 이전 설정하였다. 1939년 1월 28일에는 김영찬(金永贊)·김정환(金正煥)과 함께 곡산군 동촌면(東村面) 일대에 광업권을 이전 설정하였다. 같은 해 7월 11일에는 인현국(印鉉國)과 함께 평강군 고삽면(高揷面) 일대에 금은유화철광(金銀硫化鐵鑛)의 광업권을 설정하였다. 1940년 4월 26일 정장조(鄭仉朝)·김윤배(金潤培)와 함께 자성군 자성면(慈城面)과 삼풍면(三豊面) 일대에 금은동연광(金銀銅鉛鑛)의 광업권을 설정하였다. 같은 해 6월 28일 박원림(朴源琳)과 함께 구성군 이현면(梨峴面) 일대에, 7월 13일 역시 박원림과 함께 구성면(龜城面) 일대에 광업권을 이전 설정하였다. 1941년 6월 28일 박원림·김종욱(金鍾郁)·장석호(張錫浩)와 함께 태천군 태천면(泰川面)과 강서면(江西面) 일대에 광업권을 이전 설정하였다. 1942년 10월 서울 옥인동의 자택을 처분한 이후 한때 주거불명이었다. 1943년 11월 22일부로 경기도 양주군 이담면(伊淡面) 하봉암리(下鳳岩里)의 토지가 ‘체납’으로 인해 모두 양주세무서 공매로 넘어갔으며, 1944년 2월 4일에도 재공매 광고가 『관보』에 게재되었다. 1943년 12월에는 구성세무서에서 ‘주거불명’으로 광세(鑛稅)를 고지할 수 없어서 공시송달을 한 기록이 있다. 그러다가 1944년 4월 21일 『관보』에 구성의 광산 대표자로서 주소지가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慕賢面)으로 변경된 사실이 게재되었다. 같은 해 8월 9일부로 위의 자성군 자성면의 금은동연광의 광업권이 역시 ‘체납’으로 인해 후창세무서에 공매로 넘어갔다. 1942년 이후 위와 같은 기록들이 『관보』에서 자주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옥인동 자택을 처분한 돈을 가지고 중국으로 건너가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1945년 2월 김구(金九)로부터 국내에 밀파된 행동대원 60명의 군량(軍糧) 조달을 의뢰받고, 그 방안을 강구하던 중 일제 경찰에 기밀이 누설되어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 부통령(副統領) 이시영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직 취임을 권유받았지만 모두 사양하였다. 이에 이시영은 그의 자손들에게 재산의 소비처를 밝혀주는 「인증서(認證書)」를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1962년 10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우울한 애국지사, 인생황혼에 몸 붙일 곳 없는 이정렬 옹(翁), 1,400석 거리 가산(家産) 바쳐, 중국 떠돌며 옥살이 몇 번」이라는 기사가 실리면서 독립운동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사망 한 달 전에는 가산을 거의 탕진한 상태에서 친척 집을 떠돌고 있다는 내용도 함께 실려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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