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수
李正洙1893 ~ 1929. 2. 1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노동당
포상 정보
- · 애족장(2008)
관련 사건
- ·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8) 함경북도 길주군(吉州郡) 동해면(東海面) 석성동(石城洞)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925년 당시 32세인 것으로 보아 1893년생으로 추정된다. 1911년 19세 때 간도로 건너가 1912년 간도 소영자(小營子)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15년에는 연변교육연구회를 창립하고 훈춘교육회(琿春敎育會) 총무로 활동하면서, 20개의 소학교와 훈춘 황구(荒溝)에 북일(北一)중학 등을 창설하였다. 1917년 러시아 연해주로 가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 간부, 1920년 봄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0년 가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과에서 수학하였다. 1921년 5월 태평양회의에 수반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문서를 배포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이른바 출판법 위반으로 금고 9월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 도쿄 이치가야 감옥(市)ケ(谷監獄)에서 옥고를 겪다가 풀려났다. 1923년 5월 10일 귀국하였고, 같은 해 11월 서울에 머물며 서울파 등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였다. 1924년 5월 26일 서울을 출발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개월간 체류하다가, 그해 7월 10일 서울로 돌아왔다. 1924년 8월 17일 서울에서 전일(全一)·이남두(李南斗)·이봉길(李奉吉)·이충모(李忠模)·이재익(李在益)·김연희(金演羲)·김덕한(金德漢) 등과 함께 조선노동당을 창립하였다. 당시 조선노동당은 “무산노동자의 단결을 도모하여 공산주의적 신사회 건설을 기도함”이라는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 1924년 8월 17일 창립된 조선노동당은 스파르타쿠스당의 표면단체였다. 스파르타쿠스당은 조선노동당을 통해 대중사업을 벌여 나갔다. 1924년 11월 조선노동당에 대한 검거가 벌어지자, 이를 피해 1925년 3월 김덕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당시 이정수·김덕한 등은 남·북만주의 민족혁명단체인 국민회·철혈광복단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화요파를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이 만들어지면서 1925년 7월에는 화요회·북풍회·무산자동맹·조선노동당의 4단체합동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때 귀국한 김덕한 등과 함께 합동에 반대하면서 ‘노동자구락부기성회’를 조직하였다. 1925년 9월 5일 서울 재동 경성청년회관에서 열린 제4차 경성청년회 임시총회에 참석하였다. 1926년 2월 11일 조선노동당·경성무산청년회·프로여성동맹·경성노동조합의 4단체가 집행위원간담회를 열고 목포제유공동맹파업의 응원단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응원단 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26년 7월 22일에는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사건과 연루되어 종로경찰서에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 1927년 5월 1일에는 메이데이를 기념하기 위해 조선노동당이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한 기념강연회에서 「메이데이와 무산계급의 사명」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1928년 2월 16일에는 서울 공평동 태서관에서 열린 ‘조선공산당사건출감자위로회’에 참석하였다. 1929년 1월 20일에는 신간회 경성지회 제3회 임시대회에 회원으로 참석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이어가다가 1929년 2월 16일 오후 3시경 서울 종로3가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2월 20일 오전 10시 30분 천도교기념관에서 동지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전명혁⋮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