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元興
鄭元興1912. 4. 30 ~ 1944. 12. 1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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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1) 1912년 4월 30일 경상북도 영천군(永川郡) 임고면(臨皐面) 삼매동(三梅洞)에서 아버지 정종식(鄭宗植)과 어머니 밀양 손씨(密陽 孫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부 정인식(鄭寅植)과 백모 서흥 김씨(瑞興 金氏)의 양자가 되었다. 본관은 영일(迎日)이고, 정용복(鄭容復)이 본명이며 자를 규백(圭伯)이라 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 등지에서 4년간 고학하다 1936년 귀국하였다. 이후 군 농회지도원, 고물상, 광산의 화약출납계, 세무서 임시고원 등의 직업에 종사하였으며, 1943년 3월 중국으로 건너가 일본육군 기관의 산둥성(山東省) 사무소에 회계원으로 취직하였다. 그해 10월 화베이교통회사(華北交通會社)의 톈진철로국(天津鐵路局) 경무부(警務部)로 전직하여, 팔로군(八路軍) 항일지구로의 물자유출 상황 조사와 정보수집 등의 일을 보았다. 이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통의 공작원과 접촉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밀명을 받아 1944년 3월에 귀국하였다. 영천의 유지 정도영(鄭島榮)과 협의하여 후방 교란과 일제 무력 분산을 목적으로 대구(大邱) 동촌(東村) 비행장 폭파 계획을 세웠다. 또한 ‘미국의 소리’ 라디오 방송을 듣고 태평양전쟁에서 결국은 미국이 승리하고 일제는 패망할 것이라는 등의 말을 곽종림(郭鍾林)에게 하였다. 이 일로 그해 3월 25일 영천경찰서에 붙잡혔으며 일본군 헌병대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44년 4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육·해군 형법 및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등으로 징역 8월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이에 정식재판을 청구하였다가 취하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그해 12월 초순 옥중에서 빈사상태가 되어 가석방으로 풀려났으나, 1944년 12월 1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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