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珍澤
珍澤1902 ~ 1924. 5. 2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의군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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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8) 평안남도 진남포부(鎭南浦府) 후포리(後浦里) 출신이다. 1923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나이가 22세로, 1902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서간도로 이주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과 의군부(義軍府)에 가입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했던 인사들이 만주로 건너가 1919년 4월 15일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조직한 독립군단이다. 도총재(都總裁) 박장호(朴長浩)의 지휘 하에 류허현에 중앙본부를 두고, 주변의 콴뎬(寬甸)·지안(輯安)·환런(桓仁)·번시후(本溪湖)·싱징현(興京縣, 현 신빈현(新賓縣)) 등에 지단(支團)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평안도·황해도 등 국내에도 지단을 만들어 활발하게 항일투쟁을 펼쳤다. 이때 대한독립단에 가입하고 활동하였다. 1922년 8월 대한독립단은 남만주의 다른 16개 독립운동단체와 통합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한 후, 경신참변(庚申慘變)에 의해 폐허가 된 한인사회와 독립군기지를 재건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항일무장활동을 펼치고자 하였다. 이때 통의부에 가담한 구성원들은 처음 통합을 논의할 당시부터 개인이 가지고 있는 이념이나 노선은 모두 무시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조직이 결정한 사항만을 따르기로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구성원 간에 갈등이 생겨났다. 통의부에 참여한 다른 단체 출신은 대부분 공화주의(共和主義)를 이념으로 가졌지만, 의병 출신의 인사들이 주축이 된 대한독립단 출신들은 복벽주의(復辟主義)를 이념으로 한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이념적 갈등에 의해 대한독립단 출신의 전덕원(全德元)·채상덕(蔡相德) 등 인사들은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과 함께 이탈해 1923년 2월 의군부를 성립시켰다. 의군부는 대한독립단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박장호를 다시 총재로 추대하고 환런현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때 의군부에 가담하고, 제1중대 3소대에 소속되었다. 그리고 1923년 7월 소대장 이경일(李京一)이 지휘하는 유격대에 참여하였다. 34명으로 구성된 유격대는 같은 달 23일 환런현의 본부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8월 8일 새벽 의주군(義州郡) 광평면(廣坪面) 청성진(淸城津)에 도착하였다. 소대장 이경일은 대원들을 청성진주재소 공격조, 세관출장소와 우편국 공격조, 군자금 모집조 등 3개조로 나누었다. 이들 중 소대장과 함께 주재소 습격조에 포함되었다. 소대장은 나팔소리가 나면 일시에 행동을 개시하도록 하고 조별로 위치를 정해 대기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새벽 3시 50분 나팔을 불도록 해 일시에 각 조 모두 행동을 개시하도록 하였다. 주재소 공격조는 문을 여는 순간 총공격을 개시해 순사부장 우치다 요시타카(內田能孝)를 사살하고, 일본인 순사 마쓰오 켄(松尾謙)에게 중상을 입혔다. 주재소를 지키고 있던 일본인이 모두 정리되자 유격대는 장총 4자루, 권총 2자루, 도검 4개를 전리품으로 거두었다. 같은 시간에 세관출장소와 우편국을 공격한 조도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나왔다. 그리고 군자금 모집조는 청성진의 친일 부호들인 김창화(金昌和)와 김양춘(金陽春)의 집을 습격해 수백원의 군자금을 확보하였다. 각 조의 임무가 완수되자 유격대는 주재소·세관출장소·우편국에 불을 놓아 전소시키고, 전화선을 잘라 외부와의 연락이 단절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임무를 마친 유격대가 동이 트기를 기다려 철수하려 할 즈음, 수백 명의 일제 경찰대가 청성진을 향해 들어 왔다. 세관출장소와 우편국이 설치될 정도로 큰 청성진이 쑥대밭이 됐다는 보고를 받은 의주경찰서장은 상당한 규모의 독립군이 공격해 온 것으로 판단하고, 몇 개 중대의 경찰대를 보냈다. 이에 다수의 경찰대 공격을 받은 유격대는 사력을 다해 맞서 싸우며, 기회를 봐서 마을을 빠져나가는 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대원이 빠져나갔으나, 9명이 전사하였다. 이때 일본군에게 붙잡혀 의주경찰서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은 후 신의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었다. 1923년 10월 1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살인죄, 강도죄, 방화죄 등으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24년 4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같은 해 5월 28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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