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泰杰
泰杰1882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한교동사회
- · 육영학교
- · 식산회
- · 대한독립군비단
- · 흥업단
- · 광복단
- · 광정단
포상 정보
- · 애국장(2009)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9)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82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이한평(李漢平)이다. 1920년대 아들 이제민(李濟民)과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3년 함경남도 혜산(惠山)과 마주하고 있는 만주의 창바이현(長白縣)에 거주하며 한교동사회(韓僑董事會) 설립을 주도하였다. 이 단체의 목적은 이주한인들의 생계를 지원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이동휘(李東輝)의 지도를 받아 김도일(金道一)·박내운(朴乃雲) 등과 협력하여 만들었다. 1916년부터는 창바이현 대도구(大道溝)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육영학교(育英學校) 교사가 되어 2세들을 모아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18년 4월에는 오주환(吳周煥)·탁창규(卓昌奎)·김용흘(金庸屹) 등과 식산회(殖産會)의 회원이 되었다. 식산회는 1910년 옌지현(延吉縣) 와룡동(臥龍洞)에서 최양(崔洋)과 강석구(姜錫球)가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5년 후 장기영(張基永)이 이 단체의 책임을 맡으면서부터 결사대란 이름을 함께 사용하며 강력하면서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수행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 만주, 한국 등에 2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해 상호 활발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항일활동을 펼쳤다. 이 단체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회장과 회원들에게 조국 광복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고,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목숨이나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아야 된다. 이 절차를 통과하면 길이 1촌(寸) 5분(分), 폭 5분 정도의 무명 헝겊에 오른손 무명지를 잘라 혈서로 자기의 이름을 써 맹서하고 입회금 1원을 내면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회원이 되면 마음대로 탈퇴할 수 없었고, 변심하면 다른 회원이 암살한 후 회장에게 보고하였으며, 만주나 연해주 등에 있다가 한국으로 들어갈 때는 회장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만주나 연해주에 본격적인 독립군단이 성립되기 이전의 단체였지만 상당히 엄격한 규율을 가지며 항일운동을 펼친 결사체였음을 알 수 있다. 1919년 국내에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호응해 거주지인 창바이현 18도구(道溝)에서 이주 한인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성립된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이 그해 11월 1일 창바이현 17도구 왕가동(王哥洞) 동평덕(東坪德)에서 조직을 정비하고 편제를 새롭게 할 때 지단장에 선임되었다. 군비단은 11월 조직을 정비하기 이전인 1919년 5월부터 이미 활동을 시작한 독립군단이었다. 창바이현에 망명한 함경도 출신 민족운동가들은 3·1운동으로 조국 광복에 대한 확신이 생기자 그 열기를 이어 받아 항일무장활동 단체인 군비단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활동을 시작하려 할 즈음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군비단에서는 대표단을 파견해 임시정부와 군비단과의 관계를 정립시키고 향후 활동 방향을 정하기로 하였다. 이 대표단의 일원이 되어 상하이로 가 임시정부 인사들과 군비단을 포함한 재만 독립군단의 진로를 협의한 후, 김찬(金燦)·김정익(金鼎益)·양송경(梁松卿)·이병률(李秉律)·이재연(李在淵)·석주(石柱) 등과 창바이현으로 돌아와 군비단을 재정비 한 것이었다. 군비단은 본부 이외 창바이현 8·13·15· 16·17·18·19 20 도구 등 여러 지역에 지단(支團)과 지부(支部) 및 통신사무국 등을 설치하고 독립군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이들 거점들을 원활하게 활용해 활발한 항일무장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백두산 자락에 위치한 창바이현은 많은 크고 작은 계곡으로 이루어진 지역인데다 한국의 혜산과 접해있는 곳이었다. 따라서 재만 독립군이 근거지를 구축하고, 유격전을 위해 국내로 진입하기에는 최적지였다. 이런 관계로 창바이현에는 군비단 이외 흥업단(興業團)·광복단(光復團)·대진단(大震團)·태극단(太極團) 등 여러 독립군단이 근거지를 구축하고 활동하였다. 이들 군단들은 조직과 지휘체계가 달랐으나 항시 상호협력하며 항일활동을 펼쳤다. 함께 협력해 통신망을 구축하고, 연합 유격대를 구성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펼쳤다. 그런 과정에서 일부 간부 중에는 단체를 옮겨 활동하기도 했는데, 1921년 초에는 흥업단의 지단장이 되었다. 흥업단은 3·1운동 직후 창바이현과 접해있는 푸쑹현(撫松縣)에서 성립된 독립군단이었다. 단장 김호(金虎), 부단장 김혁(金赫), 총무 윤세복(尹世復) 등 간부진은 독립운동과 대종교 계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들이었다. 따라서 많은 청장년이 그들을 따랐기에 상당한 군세를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흥업단은 본부는 푸쑹현에 두었지만, 창바이현까지 그 세력을 확장해 지단을 설치하였다. 흥업단 지단장이 된 후, 그해 1월 15일 창바이현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단의 지휘관들이 16도구의 대진단 지단 사무실에 모여 연합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 군비단·광복단 지부·대진단 지부·태극단 등의 간부들과 참가해 독립군연합회라는 단체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참가자들은 군비단 단장인 이희삼(李熙三)을 독립군연합회의 임시회장으로 선임하고 이 단체가 향후 실천해야할 사항들을 규약으로 정하였다. 규약의 내용 중 몇 가지를 보면, “참가 단체는 향후 연락을 통일하고, 매월 15일 통상회(通相會)를 개최한다. 각 군단에서 신체 건강한 사람을 뽑아 암살대를 편성한다. 국내에 유격대를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그 자금을 북로사령부군정서(北路司令部軍政署)에 납부해 무기를 구입한다” 등이었다. 독립군연합회가 결성되고 얼마 뒤인 그해 4월 초 흥업단 지단의 주요 단원들을 이끌고 푸쑹현의 본부로 갔다. 그 곳에서 약 5개월간 머무르는 동안, 이 단원들을 북간도의 독립군 군사교육기관에 보내 훈련받도록 하고, 자신은 본부의 간부들과 향후 진로를 모색하는 계획을 입안하였다. 그리고 북간도에서 훈련을 마친 단원들이 돌아오자 8월 말 함께 창바이현의 지단으로 왔다. 장기간 지단을 비우는 동안 김창일(金昌一)이 지단장을 맡고 있어, 이후 총무의 직을 맡게 되었다. 1921년 말 창바이현의 독립군단들은 군량품징수회(軍糧品徵收會)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 단체의 활동 목표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양식을 확보해 각 군단에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이 징수회는 창바이현 내에서 한인 사회가 크게 형성된 10곳을 선정해 한 곳에 하나씩 설치되었다. 이 10개의 징수회를 총괄해 관리하고 지휘하는 총도감(總都監)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제 창바이현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단들은 연합회를 만들어 정보와 무장을 공유하고, 군량미까지 함께하는 관계가 되었다. 더 이상 명칭을 달리하며 존립할 필요가 없었다. 이에 1922년 4월 경 창바이현의 독립군단들은 하나임을 선언하고 통합해 광정단(光正團)을 성립시켰다. 광정단의 중앙본부는 조직의 최고지휘부인 총부를 만들고 그 아래 재무·군사·서무·경호·의사·권업·문화·통신·회계·위생 등의 부서를 편성하였다. 이때 광정단 중앙본부의 총무에 선임되었다. 총무는 최고지휘부인 총부 소속이었으며, 그 곳에서 단장 윤덕보(尹德甫), 부단장 강건(姜健), 비서 한운섭(韓雲燮) 등과 함께 하며 광정단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광정단의 총부는 창바이현 17도구 동평덕리(東坪德里)에 소재했으며 나머지 부서들은 16·17·18 도구의 여러 지역에 산재해 설치되었다. 그와 함께 서(署)라는 지방조직 4개를 창바이현 내 주요 한인사회에 각각 설치하였다. 통합 독립군단으로 활발한 독립전쟁을 수행하던 광정단은 1924년 중반부터 남만주의 다른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1924년 11월 24일 통의부(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성단(義成團) 등 7개 단체와 통합을 이뤄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정의부는 하얼빈 이남의 광활한 만주지역을 관할지역으로 해, 그 곳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위한 자치활동을 펼치며 조국 광복을 향한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1920년대 중후반 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와 함께 3부 시대라 불리며 재만 독립운동계를 이끌어 갔다. 정의부는 통합에 가담한 단체들에게 내부 정리를 끝내고, 각 단의 이력을 새로운 집행부를 만들기 위한 준비기관인 임시행정집행위원회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같은 절차가 끝나자 1925년 3월 9일 『정의부 공보』를 발행해 중앙행정위원회, 중앙심판원 및 민사·군사·법무·학무·재무·교통·생계·외무 등의 중앙조직을 발표하였다. 이때 중앙조직의 민사위원회에 소속된 민사부 경무과(警務課)의 주임위원에 임명되어, 독립운동 조직으로서는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는 정의부 중앙조직의 간부가 되어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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