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극
林炳極1885 ~ 미상
지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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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북로독군부
- · 대한독립군비단
- · 고려혁명군(연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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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관련 사건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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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5) 평안도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85년생으로 추정된다. 기독교인이다. 이명으로 임병극(林秉極·林丙極)·임중송(林中松)을 사용하였다.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대진단(大震團)·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등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부터 의병을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15년 왕칭현(汪淸縣) 하마탕(蛤蟆塘)에 가족들과 함께 거주하였다. 이동휘(李東輝) 등이 설립한 나자구사관학교(羅子溝士官學校)를 다녔다. 1919년 3월 노령(露領) 남부 우수리 지역 이도구(二道溝)에서 최호림(崔虎林) 등과 함께 의병대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8월 간도(間島)로 이동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5월 15일 왕칭현 춘화향(春華鄕)에서 대한국민회 각 지회 대표자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국민회 활동방안에 대한 5개 항이 결정되었고, 이진(李鎭)·김강(金强)·강구우(姜九禹)·박만홍(朴萬弘)·황일보(黃一甫)·황병길(黃丙吉)·한대진(韓大振)과 함께 실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0년 5월 28일 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군(大韓國民會軍)·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가 조직되었고, 허룽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에 독립군 부대를 집결시켰다. 이때 대한북로독군부 피복과장(皮服課長)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가을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 단원 48명을 이끌고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노령으로 파견되었다. 10월 29일 두만강 인근에서 안무(安武)와 함께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12월 국민회의 무장 대오인 대한국민군사령부(大韓國民軍司令部) 제2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시기 대원 130명과 함께 혈성단(血誠團)에 참가하였다. 1921년 3월 국민회 제2중부지방회 경호과장(警護課長)과 모연대장(募捐隊長)으로 활동하였다. 4월 29일부터 함남 갑산(甲山)·풍산(豊山)·단천(端川)과 함북 성진(城津)·길주(吉州) 등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5월 9일에는 풍산군 천남면(天南面) 신흥덕리(新興德里)에서, 5월 16일에는 단천군 북두일면(北斗日面) 신점동(新店洞)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1921년 5월 군비단 별동대장에 선임되었다. 별동대는 독립운동단체들과 한인 주민들을 위협하던 중국인 마적단을 퇴치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별동대 대원들은 국내로 진출하여 독립운동자금과 독립군 대원을 모집하고 일제 경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1921년 9월 창바이현(長白縣) 17도구(道溝)에서 군비단 의용대장 겸 군향감독(軍餉監督)으로 활동하였다. 이 시기 독립군 대원 120명을 모집하여 백두산 산림 속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별동대가 의용군대로 개편되었고, 9월 6일 대원 150명을 이끌고 창바이현을 출발하여 9월 말 노령 연해주(沿海州) 추풍(秋豊)으로 이동하였다. 솔밭관[송전관(松田關)]에서 한족공산당(韓族共産黨) 군대 본부를 방문하고 이도구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1921년 10월 추풍에서 광복단·신민단(新民團)·독군부(督軍府) 등 독립군 부대들이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조직될 때 참가하여 다음과 같은 계획을 세웠다. ①간도일본총영사관(間島日本總領事館)을 공격하고 일본군이 출동하면 격퇴시킨다. ②훈춘(琿春)을 공격하여 중국과 일제가 전투를 개시하게 한다. ②압록강, 도문강안(圖們江岸)에서 일시에 한반도 내로 공격을 전개하여 태평양회의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1921년 10월 16일 최인보(崔仁甫)와 함께 옌지현(延吉縣) 옹성랍자(甕聲磖子)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용정촌(龍井村) 상황을 조사할 계획을 세웠다. 11월 군비단 경호부장에 선임되었다. 노령에서 최진동(崔振東)·문창범(文昌範) 등과 협의하여 간도와 한반도에서 일제 관헌과 밀정을 처단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약 30명 규모로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22년 1월 안투현(安圖縣)에서 대진단 의용대장으로 활동하였다. 2월 노령 이도구에서 일제에 협력하고 있던 마적을 토벌하였다. 3월 고려혁명군 연해주총지부(沿海州總支部) 남부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남부 우수리와 훈춘(琿春)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4월 하순 일본군 제11사단이 고려혁명군에 대한 ‘토벌’에 나서자, 무장력을 보존하기 위해 5월 초 솔밭관에서 동닝현(東寧縣) 노흑산(老黑山)으로 이동하였다. 6월 말 안무 등 약 40명의 부대원들과 함께 닝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으로 이동하여 국민회장 구춘선(具春先) 등 동지들과 만나 독립운동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1922년 9월 고려혁명군 제1지대장(第1支隊長)에 선임되었다. 10월 러시아 내전에 참가하여 러시아 적군(赤軍)과 함께 포시에트에서 백군(白軍)과 교전을 벌이고 연추(煙秋)를 점령하였다. 10월 23일 적군과 함께 바라바쉬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 고려혁명군 연해주총지부 외교부장으로서, 중국과 러시아 국경지대에서 독립운동자금과 독립군 대원을 모집하였다. 11월 솔밭관 주류동(珠瑠洞)에 독립군 대원 1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사(兵舍)를 조성하였다.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인사들과 함께 한반도에서 작전을 전개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1922년 11월 17일 적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11월 20일 부하 6명과 함께 상지신동(上地神洞) 삼거리(三巨里) 정동철(鄭東哲)의 집에서 안용수(安龍洙) 등 동지들과 무장해제 상황에 관해 협의하였다. 1922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지방대표 오종환(吳鍾煥), 고려혁명군 공산당 대표 최충신(崔忠信), 송전관 지방대표 이동국(李東國), 고려혁명당 선전부장 고명수(高明秀) 등 약 30명과 함께 회의를 열고 무장해제 이후 활동 계획에 관해 논의하였다. 강국모(姜國模) 등과 함께 적군 참모부와도 협의를 진행하였다. 12월 중순 한창걸(韓昌傑)·이중집(李仲執) 등 고려혁명군 간부들과 함께 베이징(北京)에 주재하는 적군 대표와 회견하고 압수당한 무기 반환과 향후 활동계획에 대하여 협의할 것을 결정하였다. 1922년 12월 하순 항일운동가들은 노령 이만에서 대한북로군정부(大韓北路軍政府)를 조직하고 연해주에 노농신조선독립국(勞農新朝鮮獨立國)을 선포하였다. 서천민(徐天民)·임호(林虎)·김철훈(金鐵勳) 등과 함께 니콜스크혁명위원회 간부로서 참가하였다. 노령 소성(蘇城)에서 대한의병단(大韓義兵團)을 조직하여 단원 600~700명을 모집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중러 국경지역인 장령자(長嶺子)에서 무장대원 약 70명과 함께 일제의 경비상황을 조사하였다. 1923년 1월 대한북로군정부 제1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니콜스크에서 부대원 약 1,000 명을 지휘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정황 정찰반을 국내로 투입시켜 정보를 수집하였다. 1923년 1월 31일 오후 2시 상하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 정식회의에 고려혁명군 사령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3월 6일 국민대표회의에서 과거 항일운동에서 “각 단체의 잘못된 활동”으로 자유시참변이 벌어졌고 이어 독립군 부대들이 무장해제를 당했던 것을 지적하였다. 또한, 실제 운동에 적합한 최고기관을 설립하여 “자유와 평등주의에서 권(拳)과 혈(血)로 성공”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월 15일 회의에서는 개조파(改造派)의 주장에 반대하는 발언을 하였다. 1923년 4월 20일에는 창조파(創造派) 대표들과 함께 “국민이 위탁한 사명을 받아 국민적 대단결을 힘써 도모하며 독립 전도의 대방책을 확립하여 통일적 기관 하에서 대업을 기성하고자” 한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5월 12일 김세혁(金世赫)·지청천(池靑天)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6월 창조파 대표 38명과 함께 회의를 열고 18개조의 헌법을 통과시키고 국민위원 33명, 국무위원 4명, 고문 31명을 선출하였다. 1923년 8월 말 조직된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중앙집행위원부(中央執行委員部)에서 군관구(軍管區) 제1별동대장에 선임되었다. 9월 6일 한반도 내에서 일제 기관을 공격할 목적으로 15명으로 구성된 부대를 조직하였다. 10월 소수분(小綏芬)에서 김좌진(金佐鎭)·최진동(崔振東)·강국모 등과 회의를 열고, 홍범도(洪範圖)·이범윤(李範潤)·길록산(吉錄山) 등이 지휘하는 만주와 노령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를 규합하였다. 11월 15일 한반도 내에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대원 약 70명을 이끌고 안도현에서 어무현(額穆縣)을 거쳐 낭랑고(娘娘庫)로 이동하였다. 1924년 2월 10일 적기단(赤旗團), 무정단(武政團), 군정서(軍政署) 대표들과 함께 옌지현 숭례향(崇禮鄕) 명월구(明月溝) 낙원동(樂園洞) 공의준(孔儀俊)의 집에서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①용정촌, 국자가(局子街), 두도구(頭道溝), 백초구(百草溝), 훈춘의 일제영사관을 파괴하고 일제 대관(大官), 특무형사(特務刑事)와 조선인민회장(朝鮮人民會長), 밀정을 암살할 것, ②실행준비를 위해 일제영사관 상황, 왕래 행적 등을 상세하게 정찰할 것, ③폭탄과 실행원이 전부 도착하면 결행할 것. 1924년 2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개최된 한국국민위원회 회의에서 남공선(南公善)·김진규(金晉奎)·장정일(張政一)·허동규(許東奎)·이민창(李民昌)·강수희(姜受禧) 등과 함께 국민위원에 선임되었다. 국민위원회는 국민대표회의 결렬 이후 창조파 대표들이 조직한 단체였다. 5월 간도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6월 한국국민위원회 별동대장으로 활동하던 중 옌지에서 안무와 만나 항일운동에 관해 협의하였다. 1924년 9월 14일 옌지현 옹성랍자에서 동삼성(東三省) 육군 제13려(第十三旅) 제9단(第九團) 제9련(第九連) 제3패(第三排)에 체포되어, 9월 20일 국자가 진수사공서(鎭守使公署)로 압송되어 구금되었다. 1925년 8월 1일 진수사공서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허항범(許港範)·엄진천(嚴振天)·김사인(金仕仁)과 함께 징역 15년을 받았다. 1927년 중반 동지들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탈출하여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1933년 7월 이도구에서 활동하였다. 11월 콜호즈 내 종람소(縱覽所)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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