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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초

張基礎

1893. 5. 13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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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장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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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강계(江界)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강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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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서로군정서
  • · 참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2009)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09) 1893년 5월 13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외귀면(外貴面) 건하동(乾下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소하(金篠厦)·김광명(金光明)·이광명(李光明) 등이다. 1920년부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담하여 친일파를 처단하였고 1924년에는 참의부(參議府) 민사부장(民事部長)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음) 4월 강계군 문옥면(文玉面)에서 청년단(靑年團)을 조직하여 독립자금을 모집하였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서간도에 있는 서로군정서의 이재위원(理財委員)으로 활동하였다. 서로군정서는 1919년 4월 류허현(柳河縣)에서 이상룡(李相龍) 등에 의해 군정부(軍政府)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서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이재위원은 군자금 모집과 관리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서로군정서의 활동은 군자금 모집, 무장활동, 선전활동 등 크게 세 가지 영역으로 구분되었으며, 그중에서도 군자금을 모집하는 일이 중요한 임무였다. 1921년 5월 지안현(輯安縣) 쌍분하(雙分河) 도무구(道無溝)에서 친일파인 조선민단(朝鮮民團) 단원 한응보(韓應甫)와 밀정 최원탁(崔元卓)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평북 고산진(高山鎭)과 위원군(渭原郡) 위원읍(渭原邑)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제 경찰을 처단하였다. 1922년 7월 김승학(金承學)이 채찬(蔡燦, 이명 백광운)과 함께 임시정부가 발간하는 『독립신문』의 중문판(中文版)을 별도로 발행하여 중국 각 성의 공공기관 및 학교·사회단체에 반포하여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널리 선전하였다. 이때 김승학을 도와 중문판 『독립신문』 간행에 참여하였다. 1923년 8월 참의부가 창립되자 민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참의부는 1920년대 중후반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와 함께 만주지역을 대표하는 독립군단 중 하나였다. 조직을 1924년 겨울, 1926년 봄, 1927년 봄 모두 세 차례 개편했는데, 그중 1926년 봄 개편 때 군수주임을 역임했던 것을 제외하고 모두 민사부장 또는 민사위원장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참의부는 성립 이후 지안현 화전자(花甸子)를 중심 근거지로 하여 압록강 접경지역인 콴뎬(寬甸)·환런(桓仁)·지안·퉁화(通化)·푸쑹(撫松)·창바이(長白)·안투(安圖)·류허현 등을 관할 지역으로 하였다. 특히 이 지역 내 한인들의 자치활동을 기반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한인 자치 업무를 관장하는 민사부장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1928년 9월 민족유일당을 성립시키기 위한 3부 통일회의가 지린(吉林)에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단체본위조직론을 주장해온 정의부와 개인본위조직론을 주장한 참의부·신민부의 주장 외에도 신민부의 대표권항쟁문제(代表權抗爭問題), 참의부의 대표소환문제(代表召還問題) 등으로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때 참의부 대표소환문제의 당사자였다. 참의부 본부에서 3부 통일회의에 참석한 참의부 대표 중 한 사람인 그를 반동(反動) 적탐(敵探)으로 규정하고 사형 판결을 내릴 것을 요구하면서 그 집행 권한을 정의부에 위탁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참의부 대표 중 한 사람인 김승학이 나서서 오히려 본부에 있는 자들이 모함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처분권을 위임 받은 정의부측에 진술하여 겨우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그러나 끝내 3부 대표회의에서 제외되었다. 1928년 12월 3부 통합체의 하나인 혁신의회(革新議會)에 참의장 김승학이 참여하면서 참의부 해체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1929년 4월 국민부(國民府)가 성립되면서 많은 참의부 인사가 그에 가담하였다. 이때 혁신의회나 국민부에 가담하지 않고 끝까지 참의부를 이끌었지만 1929년 10월 19일 퉁화현 팔도강(八道江)에서 일제 경찰에게 붙잡히면서 참의부 역사는 모두 끝나게 되었다. 12월 5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등 으로 신의주지검으로 압송되었다. 1932년 6월 2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방화, 살인, 강도 등을 이유로 징역 15년(미결구류일수 중 73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32년 9월 1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살인교사죄로 징역 15년(미결구류일수 중 808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34년과 1940년 두 차례 감형되어 1941년 3월 13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성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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