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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철호

張喆鎬

1892. 2. 6 ~ 1945.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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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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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義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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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독립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의주군 광평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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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0) 1892년 2월 6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광평면(廣坪面) 하광동(下廣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장치욱(張致旭)·장수만(張守萬)이고, 한자가 다른 장철호(張哲浩)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송암(松菴) 오동진(吳東振)이 주도한 의주군 광평면(廣坪面)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서간도(西間島) 콴뎬현(寬甸縣)으로 넘어갔고, 광제청년단(廣濟靑年團)·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등의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대에는 서간도의 대표적인 독립군단인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정의부(正義府) 등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였고, 1930년대에도 국민부·조선혁명군 등에 참여하였다. 1919년 콴뎬현 안자구(安子溝)에서 광제청년단에 참여하고 활동하였다. 같은 해 6월 오동진(吳東振)서의 주도로 성립된 이 단체는 독립군 모집과 군자금 확보 등에 주력하였다. 광제청년단에서 활동하던 시기 만주와 한국 내에는 약 80개 청년단이 조직되어 있었다. 당시 콴뎬현에는 안병찬(安秉瓚)이 성립시킨 대한독립청년단이 있었고, 이 단체의 주도로 효율적인 독립운동 수행을 위한 청년단 연합운동이 일어났다. 그 결과 같은 해 11월 콴뎬현 향로구(香爐溝)에 본부를 둔 대한청년단연합회가 발족되었다. 이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통신기관인 교통국(交通局) 업무를 맡아 수행하는 역할을 하였다. 1920년 초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들은 더욱 효율적인 활동을 위해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다. 대한청년단연합회를 비롯해 한족회(韓族會)·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 등이 통합해, 임시정부 산하임을 선포하고 광복군(光復軍)을 성립시켰다. 광복군은 업무에 따라 참리부(參理部)·사령부(司令部)·군영(軍營) 등의 조직을 갖추었다. 그리고 무장활동에 전력할 특수부대인 광복군총영을 설치하였다. 이어서 참리부장과 사령장에는 각각 조병준(趙秉準)과 조맹선(趙孟善) 등이 선임되었고, 군사적인 임무를 수행할 각 군영의 영장은 변창근(邊昌根)·오동진·홍식(洪植)·최시흥(崔時興) 등이 맡게 되었다. 그리고 광복군총영의 총영장으로 제2군영장인 오동진이 선임되었다. 이때 광복군의 제2군영 5대장에 임명되었고, 제2군영의 간부였으므로 총영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광복군총영 경리부장인 이관린(李寬麟)과 함께 귀국해 서울에서 양기탁(梁起鐸)을 만났다. 당시 양기탁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해 일제의 침략성을 성토하며, 1907년 성립된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주도해 국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준비하는 등의 활동으로 수차례 투옥을 당하며 일제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이때 부부로 위장하고 국내로 들어와 양기탁을 탈출시켰다. 1922년 1월 서간도의 독립군단들은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결성하고 흩어진 독립군들을 불러 모았다. 같은 해 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광한단(光韓團)·광복군총영 등이 통합해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이 남만통일회에 박태열(朴泰烈)과 함께 광복군총영의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 해 8월 23일 서간도를 포함한 남만주지역의 독립군들은 다시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를 개최하고 더욱 확대된 통합 독립운동단체 결성을 숙의하였다. 그 결과 통군부를 설립할 때 참여했던 단체 이외에 관전동로한교민단(寬甸東路韓僑民團)·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대한정의군영(大韓正義軍營) 등 8개 단체 9개 회(會)가 통합해 대한통의부를 성립시켰다. 이때 통의부의 의용군 제5중대 2소대장과 헌병대 소대장으로 선임되었다. 통의부는 한동안 안정적으로 한인 사회를 지도하며 항일활동을 펼치는 독립운동단체로 조직을 유지하였다. 1922년 후반 광복 후 국가체제를 왕정(王政)으로 되돌리자는 복벽주의(復辟主義)계 인사들과 공화정을 수립하자는 공화주의(共和主義)계 인사들 간에 갈등이 생겼다. 이들 두 계통은 결국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1923년 2월 복벽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이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조직하며 분리되었다. 1923년 말 통의부는 또 다시 내부적 갈등을 겪었다. 의용군 제1중대장인 채찬(蔡燦)과 김원상(金元常)·박응백(朴應伯) 등이 상하이로 가 임시정부 인사들과 협의한 후 통의부 의용군 제1·2·3·5중대와 유격대, 독립소대 등을 이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시켜 이탈하였다. 이들은 임시정부 직속의 독립군단임을 자임하고 무장활동에만 주력하겠다는 노선을 표방하였다. 그러자 잔류한 통의부 지휘부는 1924년 7월부터 전만통일회(全滿統一會)를 결성해 다시 남만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통의부를 비롯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 등이 통합에 합의하였다. 그해 11월 24일 성립된 정의부는 하얼빈(哈爾濱)부터 북간도까지 선을 그어, 그 이남의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관할하였다. 그리고 통의부에서와 마찬가지로 한인 사회를 대상으로 생존과 산업을 위한 자치활동을 실시하고, 의용군을 편성해 항일무장활동을 펼쳤다. 정의부 성립 초기에는 중대장 김창룡(金昌龍)이 지휘하는 제8중대 3소대장에 임명되었다. 이어 1926년 중반에는 제2중대장이 되어 서간도와 북간도의 경계 지점인 푸쑹현(撫松縣)에 주둔하며 정의부 의용군의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북간도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에게서 정의부 중앙본부에 납부해야 할 의무금과 의연금을 모집하거나 친일파를 척결하는 업무도 수행하였다. 한편 옌지현(延吉縣)·왕칭현(汪淸縣)·훈춘현(琿春縣)·허룽현(和龍縣)·안투현(安圖縣) 등 북간도 지역은 정의부의 관할이었지만, 중앙본부와 떨어져 있어 제대로 관리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정의부는 이들 지역에 모연대(募捐隊) 또는 암살대(暗殺隊) 등을 파견하였다. 이러한 조직을 구성해 파견한 곳은 삼림이 울창한 백두산 자락에 위치한 푸쑹현이었다. 이곳에 상당수의 병력과 함께 주둔한 제2중대는 국내 일제의 동향을 살피면서 5~10명 정도로 구성된 파견대를 북간도 지역으로 보냈다. 1926년 8월 26일에는 약 150명의 중대원을 이끌고 안투현 두도백하(頭道白河)로 근거지를 옮겼다. 두도백하는 푸쑹과 안투의 접경지역이면서 대규모 한인 사회가 형성되어 있는 북간도에 아주 근접한 곳이었다. 이곳에 한인 사회를 관할하기 위한 정의부 지방조직인 총관(總管)을 설치하고, 모연대와 암살대를 구성해 북간도 지역의 이주 한인으로부터 의연금을 징수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중앙본부에서 한참 먼 곳에서 활동한 이들 파견대는 상당한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지만, 피해도 컸다. 1926년 봄부터 안투현에서 활동한 28명으로 구성된 정의부 암살대는 한교판사처(韓僑辦事處)라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한인들을 괴롭힌 박춘산(朴春山) 등 5명의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이에 일제는 중국측을 강압해 암살대를 추적하도록 하여, 같은 해 9월 4일 대원 1명이 사살되고 6명이 붙잡히기도 하였다. 암살대의 활동이 노출되어 일제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자 제2중대의 근거지를 다시 푸쑹현으로 옮기고, 1928년 2월부터 국내 진입전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제2소대장인 김경근(金京根)에게 명령을 내려 국경을 넘어갈 준비를 시켰다. 김경근은 소대원들에게 3~4명으로 1조를 만들어 월경할 수 있는 지점을 찾도록 하였다. 이 같은 정의부 의용군 2중대의 움직임을 간파한 일제는 국경지방인 혜산진(惠山鎭)에 특별 경계령을 내려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2중대는 국내와 인접한 창바이현(長白縣)에 빈번하게 부하들을 파견해 일제의 동태를 살피고 국내 진입전을 시도하였다. 이에 일제는 제2중대의 움직임을 더욱 주시하였고, 밀정을 창바이현과 푸쑹현으로 보내 공격 기회를 엿보았다. 그 과정에서 일제는 “정의부 제2중대장 장철호가 1928년 8월 15일 부하 한 명과 무송·안도 경계의 산중에서 중국마적의 습격을 받고 부하와 함께 사살되었다.”는 보고 문서를 올렸다. 1928년 8월 19일 발행된 『동아일보』에도 이러한 사망소식이 전해졌지만, 이후 계속 활동한 사실들이 확인된다. 1927년에는 만주지역 독립운동계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해 4월 15~18일까지 4일간 지린현(吉林縣) 신안둔(新安屯)에 52명의 대표자들이 참가해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건립을 위한 전만 독립운동단체 통일회의가 개최되었다. 이후 약 2년간 독립운동단체 지도자들이 노력한 결과, 1928년 12월 하순 북만주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펼칠 혁신의회(革新議會)가 성립되고, 1929년 4월 1일 남만주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부(國民府)가 성립되었다. 중앙집행위원장 현익철(玄益哲)이 이끈 국민부는 정의부 세력이 주축이 되었다. 이때 국민부 제5중대장에 선임되었다. 국민부는 1929년 5월 말 항일무장활동을 수행할 무장대를 따로 분리해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을 세우고, 같은 해 12월 20일 조직을 지도할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창건하였다. 조선혁명군이 편성되자, 10개 대(隊)로 편성된 무장대의 제2대 대장에 선임되어 퉁화현(通化縣)의 동남(東南)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길돈선(吉敦線) 교하(蛟河)까지 범위를 넓혀 한국에 이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혈안이 된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활동을 펼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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