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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덕원

全德元

1877. 11. 18 ~ 1943. 10.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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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전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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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용천(龍川)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용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관서의병
  • · 대한독립단
  • · 의군부
  • · 13도유약소(13道儒約所)
  • · 대한통의부
  • · 한복단
  • · 대한통군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을사늑약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77년 11월 18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북중면(北中面) 인고동(仁古洞)에서 태어났다. 호는 호은(湖隱)·정송(梃松)·소성(小醒)이다. 가족으로는 아들 전의택(全毅澤), 동생 전덕근(全德根)과 전덕림(全德林)이 있었다.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이고 대종교인(大倧敎人)이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규탄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평북 용천에서 서울로 이동하였다. 각지의 유생(儒生)들이 을사늑약을 성토, 파기하기 위해 설치한 13도유약소(13道儒約所)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1월 18일 김동필(金東弼)·경현수(慶賢洙)·이봉학(李鳳學) 등과 함께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5적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각국 공사관에도 공함(公函)을 보내 을사늑약 체결 무효를 주장하였다. 김연식(金璉植)과 박성준(朴聖俊) 등이 유약소의 활동을 밀고함으로써 주도자들이 체포되어 상소 항쟁은 실패하였다. 1905년 12월 평북 용천에서 계행건(桂行蹇)·김두섭(金斗燮)·박순채(朴舜采)·김선팔(金善八)·장달빈(張達彬)·김상욱(金相旭) 등과 함께 가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자금으로 무기를 확보하여 관서의병(關西義兵)을 조직하였다. 이 의병은 실제 활동에 들어가기도 전에 주도 인물들이 체포됨으로써 해산되었다. 이때 함께 붙잡혀서 선천(宣川)·철산(鐵山)·의주(義州) 등지에서 강압적인 조사를 받다가 남만주(南滿洲) 안둥현(安東縣, 현 단둥시)까지 끌려가 고초를 겪은 뒤 1906년 봄에 석방되었다. 1906년 (음)3월 박양래(朴樑來)와 함께 자신의 집에 평안남북도 유약소를 설치하고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선천지역 친일행위자 한국현(韓國顯)을 처단하기로 하고 무기를 조달하기 위해 안둥현으로 사람을 보냈다. 이 시기 홍주(洪州)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의병에 참가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박영수(朴永秀)·박양래와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동지를 규합하다가 의주감리서(義州監理署)에 붙잡혔다. 같은 해 9월 서울로 압송되어 12월 13일 평리원(平理院) 재판에서 유형(流刑) 15년을 받고 황해도 철도(鐵島)에 유배되었다. 유배 시기 일제가 진위대(鎭衛隊)를 해산할 당시 1907년 6월 26일 황청일(黃淸一)·이세영(李世永)·민형식(閔衡植)·이석종(李奭鍾)과 함께 일본군 수비대 영창에 16일간 구금되었다. 12월 순종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1913년 동지들과 함께 남만주로 이주하였다. 1919년 4월 13일 펑톈성(奉天省, 현 랴오닝성(遼寧省))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독립운동단체 대표자들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사흘의 토론을 거쳐 4월 15일 각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결성하고 재무부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김승학(金承學)·백의범(白義範)·백기준(白基俊) 등과 함께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의 활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12월 대한독립단 도총재(都總裁) 박화남(朴華南), 총재 백온당(白溫堂)과 협의한 후 부하들과 함께 용천군 북중면으로 이동하여 장일중(張日中)의 집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수일 후 철산군 정혜면(丁惠面) 장송동(長松洞) 임상민(林尙民)의 집과 임천민(林天民)의 집에서도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또한, 임대훈(林大塤)을 만나 그의 아버지 임치민(林置民)을 대한독립단 부총재로 영입하기 위해 협의하였다. 1920년 4월 19-20일에 개최된 대한독립청년단 제2차 정기총회에 윤창선(尹昌善)·양기하(梁基瑕) 등과 함께 내빈으로 참석하였다. 10월 대한독립단 간부들이 국내에서 전개할 작전을 논의할 때 서울로 진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1월 윤학천(尹學天) 외 6명과 함께 용천군에서 격문을 배포하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1월 19일 평양(平壤)과 개성(開城)에 독립운동자금을 의연(義捐)하라는 내용의 문서를 배포하였다. 1920년 10월 2일 일제가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2만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간도(間島)를 침공하였다. 10월 초에서 11월 말 사이 일제는 간도 한인 3,000여 명을 학살하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켰다. 이 시기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면서 무장 역량을 보존하기 위해 근거지를 이동하였다. 1921년 4월경 일본군이 철수한 후 독립군 부대들은 근거지로 되돌아와 부대를 정비하였다. 1922년 1월 남만주에서는 각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2월 대한독립단·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한단(光韓團)·한교회(韓僑會) 등 단체가 통합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조직되었다. 통군부 경무감(警務監)에 선임되었다. 1922년 봄 결사대를 파견하여 통화일본영사관(通化日本領事館)과 친일단체 보민회(保民會)를 공격하였다. 보민회는 조선총독부 경무국(警務局)이 후원하여 1920년 초 신징현(興京縣)·환런현(桓仁縣)·퉁화현(通化縣) 일대를 중심으로 친일 한인들이 조직한 단체이다. 보민회에서는 만주 독립운동단체 상황을 조사하여 일제에 보고하였고 무장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하여 독립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1922년 6월 3일 통군부 간부들은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더욱 확대된 통합군단을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8월 23일 환런현 남구(南區)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南滿韓族統一會議)가 개최되었다.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관전동로한교민단(寬甸東路韓僑民團)·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대한정의군영(大韓正義軍營)·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部) 등 단체 대표 70명과 함께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7일간 회의를 거쳐 8월 30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었다. 통의부 참모부감(參謀部監)에 선임되었다. 1922년 10월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통군부 대표로서 수행원 22명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 대표로 활동하였다. 1923년 2월 환런현 대황구(大荒溝)에서 의군부(義軍府)를 결성하고 군무부장(軍務部長)에 선임되었다. 5월 의군부 중대장 윤성권(尹成權)과 소대장 김상률(金尙律)을 만나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관해 협의하였다. 콴뎬현(寬甸縣) 반랍령(半拉嶺)에서 의군부 총재 채심호(蔡深湖)의 권유로 한반도에 배포할 공포문(公布文)을 작성하였다. 1923년 8월 8일 유격대장(遊擊隊長) 이경일(李京日) 등 30명을 국내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서 평북 의주군(義州郡) 광평면(廣坪面) 청성진(淸城鎭)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을 사살하고 세관출장소(稅關出張所), 면사무소, 우편국(郵便局) 등 일제 기관에 불을 질렀다. 한복단(韓復團)을 조직하여 1926년 말부터 1927년 2월까지 압록강 인근 지역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1927년 2월 24일 안동현 대고산(大孤山) 평리(平里)에서 안동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혔다. 신의주경찰서(新義州警察署)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3월 7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검사국에서 조사를 받은 후 3월 11일 예심(豫審)에 회부되었다. 1928년 1월 16일 예심이 종결되어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살인죄, 강도죄, 방화, 폭발물취체규칙(爆發物取締規則) 위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같은 해 3월 12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5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8월 20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이병기(李炳基)·박승연(朴勝衍)·홍주(洪疇) 등과 함께 『독립사(獨立史)』를 편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박상문(朴尙文)이 밀고하여 다시 붙잡혔다. 1943년 10월 8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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