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홍섭
全弘燮1890. 2. 16 ~ 1938. 5. 1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국민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간도 15만원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0년 2월 16일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회령면(會寧面) 일동(一洞)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전홍섭(全洪燮)이다. 러시아 이름으로는 전아브러라를 사용하였다. 가족은 처와 자녀 6명이 있었다. 1918년 6월경부터 간도(間島) 용정촌(龍井村)에서 조선은행 출장소 서기(書記)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간도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간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그 해 2월 18일과 20일 옌지(延吉) 하장리(下場里)에서 비밀회합을 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만세운동 진행 중에 일제 군경과 충돌하거나 체포 또는 희생될 때를 대비하여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다. 각급 학교 학생들도 만세운동 준비에 참여하였다. 3월 7일 국내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지고 민족대표 명의의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어 만세운동 추진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촌 북쪽 서전(瑞甸)에서 ‘조선독립축하회’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일 낮 12시 조선독립축하회가 시작되었고, 대회장 김영학(金永學)이 ‘간도 거류 조선 민족 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 포고문」을 낭독하였다. 이어 군중은 용정 시내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만세운동이 진행되던 중 중국 군대가 발포하여 현장에서 13명이 사망하였고 부상자 30여 명이 발생하였다. 부상자들은 제창병원(濟昌病院)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치료를 받던 중 4명이 사망하였다. 동지들과 함께 사망자들을 병원에 안치하였다. 간도 만세운동 당시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은 의사부(議事部, 정식 명칭은 조선국민의사회(朝鮮國民議事會))가 주도하였다. 의사부는 조선독립축하회 직후 조선독립기성회(朝鮮獨立期成會)로 명칭을 바꾸었다.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고 임시헌법이 발포되자 조선독립기성회라는 명칭이 국호(國號)에 저촉된다 하여 각 지방 단체 대표자들이 회의를 개최하고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이하 국민회)로 개칭하였다. 이때 국민회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5월 방원성(方遠成)·윤준희(尹俊熙)·이익찬(李翼燦)과 함께 간도일본총영사관(間島日本總領事館) 경찰서의 한인 경찰들을 회유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같은 달 10일 경부(警部) 현시달(玄時達)을 그의 집에서, 5월 12일 외무성순사(外務省巡査) 안창호(安昌鎬)를 용정촌 십자가(十字街)에서 각각 만나 그들이 제창병원으로 가도록 하였다. 제창병원에서 방원성·윤준희·이익찬이 그들과 만나 일제 경찰에서 사직할 것을 권고하였다. 현시달과 안창호는 방원성·윤준희·이익찬과의 면담에서는 사직을 고려해 보겠다고 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으나, 결국 사직하지 않았다. 1919년 9월 제창병원 뒤 공동묘지에서 윤준희·임국정(林國楨)과 만나 독립운동자금 확보를 논의하였다. 12월 초 최봉설·윤준희와 만나 독립군 대원을 양성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방안에 대해 협의하였다. 구체적인 방안으로 일제 은행을 공격하기보다는 일제가 길회철도((吉會鐵道), 일제가 만주 침략을 목적으로 지린과 회령(會寧) 사이에 부설한 철도) 부설에 필요한 자금을 회령에서 간도로 수송하고 있으니 현금을 수송해 오는 호송대를 공격하여 자금을 확보할 것을 제안하였다. 길회철도 부설에 필요한 자금은 10월 중순 35만 원, 11월 중순 28만 2천 원이 수송되었다. 10월 중순 현금 수송 때 회령으로 출장하여 현금을 수송한 경험이 있어 현금이 수송되는 상황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1919년 12월 31일 조선은행 용정촌 출장소 일본인 소장 외 1명으로부터 1920년 1월 4일 현금 14~15만 원이 회령에서 용정으로 수송되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를 1920년 1월 1일 임국정에게 서신으로 알렸다. 1월 2일 연길병원(延吉病院) 의사인 임국정의 조카에게 회령으로 갔다가 1월 4일 용정으로 돌아오겠다고 알린 후 회령으로 출발하였다. 1월 2일 임국정·윤준희는 서신을 받고 1월 3일 간도 명동(明東) 향교동(鄕校洞) 김계하(金桂河)의 집에서 한상호(韓相浩)·박웅세(朴雄世)·김준(金俊)·최봉설 등 4명과 함께 현금 호송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1920년 1월 4일 오후 5시경 위 6명은 간도 동량(東良) 상리사(上里社) 동량어구(東良於口)에서 조선은행 회령출장소 서기 김용억(金容億), 호위 순사 등으로 구성된 호송대를 공격하여 조선은행 발행 10원권 5만 원, 5원권 10만 원, 합계 15만 원을 확보하였다. 이를 ‘간도 15만 원 사건’이라고 한다. 이들은 확보한 자금으로 무기를 구매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였다. 2월 1일 이들은 무기 구매를 진행하던 중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한편, 조선은행 회령출장소 일본인 소장이 회령경찰서에 신고하여 1920년 1월 4일 밤 붙잡혔다. 체포 후 간도일본총영사관 경찰서에서도 회령경찰서에 구금시킬 것을 요청하였다. 회령경찰서에서는 1월 20일 간도 15만 원 사건과 관련된 사항을 파악하였고, 1월 28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 검사국에 송치하였다. 검사국에서 조사를 마치고 예심에 회부되었다. 8월 국민회에서는 가족들에게 구제금을 전달하였다. 9월 4일 예심이 종결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20년 11월 4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10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고, 12월 8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1921년 1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5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4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옥고를 겪던 중 폐병으로 가출옥(假出獄)하여 하바롭스크로 망명하였다. 이후 통합국가정치관리국(ОГПУ, Объединенное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е Политическое Управление) 치타시 내무성 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게뻬우(소련 국가정치보안부)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이후에는 붉은기특별원동군단(ОКДВА, Особая Краснознаменная Дальневосточная Армия) 참모부에서 활동하였다. 1937년 3월 26일 간첩 혐의로 소련 당국에 붙잡혔다. 1938년 4월 15일 극동지역 내무인민위원회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형법 58조 16항 위반으로 사형을 받았다. 5월 11일 하바롭스크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57년 3월 13일 적색 극동 군사지구 군사재판소에서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